[소설]오래된 정원(162)

  • 입력 1999년 7월 7일 18시 29분


아니 온 세상 사람들의 말투야. 나는 다만 자유라든가 사람의 기본권이라든가 생존의 존엄성 등등을 존중하는 세상이었으면 해. 그이도 그런 사람에 지나지 않았어.

글쎄 나두 학교에서 운동권 친구들 많이 아는데 다 좋아. 좋긴 한데 특별한 척 하는 거 하구 병정놀이 같은 권력이 싫어.

나 요새 불경을 보는데 거기 이런 말 있더라. 보살은 자기가 보살행을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먹는 존재래. 악과 싸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대방을 닮아서 욕망의 뿌리를 다 잘라버릴 수는 없을 거야. 그게 세상살이의 한계란다. 그래두 그걸 무릅쓰는 젊은이는 아름답지 않니?

난 몰라, 모르겠어. 왜 하필이면 언니가 그런 사람과 기약도 할 수 없는 삶을 감당하려고 하는지….

그래 이건 나의 삶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온. 나는 그 사람과 꼭 반 년 같이 살았어. 그리고 남은 게 은결이야. 또 남은 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들하구. 그 사람 말투로 말하자면 사람과 세상의 가장 큰 특성은 변화래. 나는 당분간 밖에서 그리고 그이는 어둠 속에서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들을 겪을 거야. 나는 열심히 살고 싶어.

우리는 언쟁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정희가 나하고는 달리 아버지의 무너져버린 평생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줄을 눈치 챘지요. 나는 아버지가 숨지기까지의 몇 달 동안을 그이와 밤낮으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이해할만큼 가까워졌고 내쪽에서 모든 매듭을 다 풀고야 말았지만. 아마 엄마는 벌써 오래 전에 아버지가 산 생활을 하시던 때에 벌써 졸업을 해버렸겠지만요, 나는 아내가 아닌 딸이니까 시간이 더 걸린 셈이겠지요. 그래요, 사는 일에는 에누리가 없지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든 끌어안고 겪는 이에게만 꼭 그만큼 생은 자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차례 차례로 내놓거든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정희가 답답하다는 듯이 두 손을 벌려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나는 훨씬 너그럽게 대답했습니다.

방금 다 말했잖니? 열심히 살 거라고.

정희는 백을 가져다가 열더니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불을 붙여서 제법 익숙하게 깊숙이 빨고는 사연 많은 아낙네 같이 길게 내뿜었어요.

하는 수 없이 나두 찬성할게.

그네는 다시 덧붙였습니다.

언니는 참… 대단해.

그래 날 좀 도와줄래?

엄마를 놀라지 않게 해달라구? 그 이상 해줄거야. 은결이두, 말하자면 우리 같은 딸이잖아?

나는 가슴에 무슨 전기라도 닿은 것처럼 찌릿해졌는데 때 마침 은결이가 선잠이 깼는지 울기 시작했어요. 내가 얼른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은결이를 안아 올렸더니 궁둥이께가 축축해요. 은결이를 다시 눕히고 기저귀를 갈아 주기 시작했어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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