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필의 말들이 2.4㎞의 말굽형 경마장 마지막 코너를 돌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던 도중 관중의 함성은 갑자기 ‘앗’하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한 여성이 트랙안으로 뛰어들었다 질주하던 당시 국왕 조지5세의 말 앤머에 치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38세의 열열한 여성참정권 운동가였다. 데이비슨은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고발생 4일후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점차 폭력화의 길로 접어들있던 여성참정권 운동에 기름을 끼얹었다.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의 성난 외침은 데이비슨의 죽음으로 활화산 처럼 폭발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영국인들, 특히 남성들은 데이비슨의 경마 트랙 돌진행위에 대해 ‘재수없는 여자가 신성한 더비 경마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대표적 신문 ‘더 타임스’ 6월5일자를 봐도 당시 영국인들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데이비슨 관련 기사의 제목은 ‘여성참정권자 사건, 폐하의 경마기수 다치다’였다. 데이비슨의 순교적 행위보다 얼굴에 타박상을 입은 왕의 기수 허버트 존스의 건강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던 때였다.
여성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의 ‘게릴라 투쟁’은 데이비슨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철도역 음료수판매소 축구장 심지어 남성본위 이념의 본산이었던 교회들이 이들에 의해 불에 탔다. 성난 여성들은 전선을 절단하고 “하원을 습격하자”고 선동했다.
경찰에 끌려간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간수들은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입을 강제로 벌린 뒤 음식을 투여해야만 했다.
데이비슨 역시 전투적 여성참정권자였다. 그는 1906년 WSPU에 가입했으며 1909년에는 맨체스터에서 돌을 던진 혐의로 최초로 체포됐다. 이어 우체통에 불을 지르고(1911년), 정치인 로이드 조지경의 저택을 습격했다(1912년). 또 그해 할로웨이 형무소에서 단식투쟁중 계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데이비슨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여성이 운집했고 ‘승리’ ‘승리’를 외치던 이들의 함성은 이내 장례식을 시위장으로 바꾸었다. 에멀린의 딸 크리스타벨은 데이비슨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다른 방법, 어떠한 다른 장소와 시간을 선택했더라도 그처럼 효과적으로 수백만명의 관심을 여성참정권자의 주장에 집중시킬 수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데이비슨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시발지’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거대한 원동력이 됐다. 영국 정부는 마침내 1918년 30세 이상, 1928년에는 21세 이상 여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데이비슨이 왜 경마장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남아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기차왕복표를 소지하고 있었다. 특히 사고 당시 12마리의 말은 이미 사고현장을 지나친 상황이었고 왕의 말을 비롯한 3마리만이 선두그룹과 30여m 차이를 두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데이비슨이 경주마가 모두 지나간 것으로 착각, 시위를 벌이려다 때마침 달려온 왕의 말에 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녀의 동기가 무엇이든 그녀의 이름은 20세기 세계 여성참정권 운동사에‘순교자’로 기록됐다.
〈런던〓윤영찬기자〉yyc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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