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의 연봉제는 경영자와 근로자가 자유로운 계약을 전제로 실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근로기준법 등 노동 관계법이 연공서열제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돼 있어 경영자와 근로자 간의 자유로운 쌍방 계약을 가로막는다. 관련 법규가 근로자를 지나치게 넓게 규정해 간부급의 연봉제 실시도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올초 노동부 조사결과 직원 100명 이상인 사업장 4303곳 중 15.1%인 649곳에서 연봉제를 도입했고 30.2%인 1458곳에선 도입 준비 중이거나 도입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통계상으로는 상당수 기업이 연봉제를 채택했지만 실상은 연공서열제에 바탕을 둔 어정쩡한 연봉제다. 한국경총 부설 노동경제연구원 양병무(梁炳武)부원장은 “국내 기업들은 미국식 연봉제 도입의 전단계로 기존 연공서열급을 기준으로 업무성과급에 차등을 두는 ‘한국식 연봉제’를 실시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식 연봉제는 직무와 업무성과에 따라 연봉을 주는 제도다. 기업에 이익을 많이 안겨주는 직무를 맡을수록 고액을 받지만 ‘한국식’ 연봉제는 아직 직무의 경중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물론 미국식 연봉제라고 하더라도 프로 스포츠 구단처럼 파격적인 방식은 아니다. 미국 기업은 단기실적을 중시하는 스포츠구단과 달리 근무성적에 따른 진폭이 크지 않고 직원이 일시적으로 슬럼프에 빠졌다고 임금을 대폭 삭감하거나 해고하지 않는다. 세계 최대의 시리얼 제조업체인 미국 켈로그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박용주씨(38)는 “미국의 대기업들은 직원이 바로 최대고객이라고 생각하고 임금을 바로 투자로 여기는 마인드가 정착돼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인 MSD 한국지사는 한국 실정에 맞추어 부장 차장 과장 등 직책을 만들었지만 직책이 높다고 연봉을 많이 주지 않는다. 어떤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업무성적을 따진다.
미국 기업은 개인의 고과성적에 따라 임금이 크게 차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일팀 내 하위직급자가 팀장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 회사 이모과장(39)은 “업무 성적이 좋지 않다고 곧바로 임금을 깎지는 않으며 몇 년째 계속 나쁠 때는 직무를 바꿔 불이익을 준다”고 말한다.
미국의 연봉제는 직원에게 이익을 배분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대표적인 것은 요즘 한국 기업들이 도입하기 시작하는 스톡옵션. 일정 시기에 일정수량의 주식을 미리 정한 금액에 살 수 있는 권리다. 직원들은 주가가 오르면 차액만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을 많이 내기 위해 땀을 쏟는다. 스톡옵션은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사지 않을 수 있어 주식이 내린 만큼 손해보는 ‘우리사주 주식’과는 다르다.
한국 근로자들은 연봉제 자체를 곱게 보지 않는다. 민주노총 주진우(朱鎭宇)조사통계국장은 “연봉제를 실시하려면 투명한 경영과 공정한 인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봉계약은 자유로운 쌍방향 계약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부하직원이 경영자의 눈치를 보는 기업풍토에서 자유로운 계약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 초 대한상의가 연봉제를 실시하는 한국기업 직원 5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사고과제도에 대해 21%만 적절하다고 대답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54%가 인사고과제도가 적절하다고 응답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봉제를 주로 업무책임이 명확한 중간관리자 이상이나 전문직에게 적용하고 생산직 임금은 대부분 노조와 일괄 협상을 통해 결정된다. 연봉제를 실시하는 한국 기업 중 30.5%가 전문직과 과장급 이상만을 대상으로 하고 전직원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하는 기업은 전체의 19.4%에 불과하다.
중간관리자급 이상에게만 적용할 때는 노동 관계법과 상충된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의 변경시 직원 과반수로 구성된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단체협상이 체결되면 중간관리자 이상도 일반적으로 구속된다. 따라서 노조가 적극 반대하면 간부급에 대한 연봉제도 실시하기 어렵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이사도 근로자이다.
경영주와 직원이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퇴직금과 상여금을 받을 수도 없다. 법인세법에 따르면 회사의 임금 규정에 따르지 않는 퇴직금과 상여금은 손비(損費)보다 이익으로 계상된다. 따라서 기업에서 근로자와의 연봉계약 때 고액의 퇴직금과 상여금을 제시하기 어렵다.
고액 연봉이나 스톡옵션을 받는 사람의 고액 세금도 문제. 미국에선 독신이나 가장의 연봉이 27만8450달러(약 3억2300만원) 이하이면 15∼36%, 이상이면 39.6%의 세금을 내지만 한국은 8000만원 이상이면 무조건 40%의 세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소득세법의 정비도 시급하다.
미국에선 요즘 최고경영자(CEO)의 과도한 연봉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비즈니스위크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CEO는 근로자 평균임금보다 326배나 더 받는다. 97년 옥스퍼드헬스플랜스사는 2억9100만달러의 적자였지만 최고경영자는 300만달러를 받았다. 옥스퍼드헬스플랜스사의 최고경영자는 종업원을 대량 해고하고 자신은 224% 인상된 3340만달러를 챙겨 지탄을 받았다.
CEO의 연봉을 결정하는 이사회의 멤버에 다른 회사의 CEO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서로의 연봉을 올리는 식으로 협력한다. 이정한변호사는 “연봉제가 근로자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최고경영자가 몽땅 가져가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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