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TV발명]감전사고가 탄생시킨 「안방극장」

  • 입력 1999년 7월 14일 18시 36분


‘퍽.’

1924년 7월. 유럽대륙과 마주하고 있는 영국 남부 해안 소도시 헤이스팅스의 퀸스거리에 있는 한 허름한 연구실에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세상에서 처음보는 기묘한 기계의 전압을 1200V로 상승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끌어댄 전기선을 만지던 존 로지 베어드라는 한 발명가가 실수로 감전되면서 창문 밖으로 튕겨나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 의식을 잃은 베어드는 손에 화상을 입었고 그가 애지중지하던 기계는 크게 파손됐다. 건물주인이 이 ‘사고뭉치’ 발명가를 내쫓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사고는 베어드에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다. 세계 최초로 화상을 전송하는데 성공,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베어드의 감전 사고 소식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이 가난한 발명가에게 후원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존 로지 베어드, 그는 ‘TV의 아버지’로 기록돼있다. 베어드가 살았던 동시대 많은 사람들은 이미 TV의 개념을 알고 있었고 이 ‘마술상자’를 발명하려고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1911에는 전기공학자 캠벨 스윈턴이 전자식 TV를 설계했지만 이는 말그대로 ‘설계’였을 뿐이었다. 베어드가 무선 화상전송실험에 성공하기 1년전인 23년에는 미국의 블라디미르 주어리킨이 TV특허신청을 냈지만 화면에 그림자만 나타나 주목을 받지 못했고 특허도 기각됐다. 그러나 베어드는 24년 TV 기술의 핵심요체인 무선 화면전송 실험에 최초로 성공했고 이를 상업화했다.

청년 베어드의 원래 꿈은 발명가가 아닌 사업가였다. 1888년 스코틀랜드 헬렌스버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이 지역의 습기찬 기후에 착안, 방습 양말 제조공장을 차렸다. 그의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줄곧 베어드를 괴롭힌 것은 습기와 차가운 날씨에 약한 그의 폐였다.

따뜻한 햇살을 찾아 베어드는 카리브해 트리니다드로 이주, 잼 설탕 비누공장 등 닥치는대로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건강은 점점 악화됐고 결국 사업에도 실패한 베어드는 빈털터리로 런던에 되돌아왔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사업’은 당시 사람들이 열망하던 전선과 전파로 화상을 보내는 방법을 발명하는 것. 런던의 허름한 다락방에서 그는 대학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니프코프가 발명한 원판원리를 기초로 원시적인 TV시스템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차 도구를 넣는 상자, 마분지, 감치기 바늘과 쓰다 버린 목재, 자전거에서 떼어낸 렌즈, 모자 상자 2개 등이 그가 만든 TV시스템의 재료였다. 그는 이 기계로 화면에 그림이 나오도록 수개월간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는 1922년 건강악화로 따스한 영국의 최남단 도시 헤이스팅스로 이주, 발명에 몰두했다.

24년 그는 마침내 무선으로 몰타인 초상화를 수m 거리에 전송하는데 성공한다. 감전사고 후 유명해진 베어드는 24년 말 런던으로 돌아가 TV와 사업을 결합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25년에는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돈을 받고 인형화상을 전송한데 이어 자신의 연구실 사환이었던 윌리엄 테인턴이라는 소년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 전송했다.

27년 미국의 AT&T사가 뉴욕∼워싱턴간 320㎞ 화면 유선전송 실험에 성공하자 베어드는 런던∼글래스고간 700㎞ 화면 전송 성공으로 맞섰다. 베어드는 또 28년 AT&T가 뉴욕∼뉴저지간 43㎞의 무선전송에 성공하자 아예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전파를 쏘아 화상전송에 성공하는 개가를 이뤘다. 29년에는 BBC방송을 통해 최초로 실험방송을 송출했으며 31년에는 엡섬다운스 경마를 생중계했다. TV발명의 게임은 베어드의 승승장구로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베어드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가 발명한 TV의 결정적인 허점은 기계식이라는데 있었다. 기계식 TV는 35년 EMI사가 개발한 전자식 TV에 비해 화면이 어둡고 깜박거렸다. 36년 TV방송 시스템 결정을 앞두고 기계식이냐, 전자식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BBC 방송은 수개월간의 시험방송 끝에 결국 베어드를 외면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EMI의 조직적인 TV개발팀과 달리 30여년을 거의 혼자서 TV발명에 매달려온 베어드는 46년 부도 명예도 얻지 못한 채 일생을 병마와 싸우다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TV 발명가’라는 이름만을 남기고….

〈헤이스팅스〓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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