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원칙없는 세금 복병에 원망의 소리

  • 입력 1999년 7월 15일 18시 44분


지난해 12월 통합반도체 법인의 경영주체로 선정된 현대전자는 LG와 인수가격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 뒤늦게 수천억원의 세금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당황했다. 현대가 LG에 주식 인수 대금으로 지급할 금액은 총 2조5600억원. 법인세법 80조에 따르면 합병으로 인해 소득이 발생하면 피합병법인이 청산소득에 대해 법인세를 물게 돼 있다. LG반도체는 자기자본 약 1조5000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 세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어림잡아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LG 쪽에서 순순히 세금을 부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수금액 협상 자체가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현대는 “합병으로 소득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막대한 세금을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합병하려는데 세금이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구조조정 작업을 지연시키는 족쇄로 작용하면 안된다는 명분이었다. 결국 지난달 재정경제부는 당초 올해말까지로 예정된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의 세제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현대전자는 한시름 놓게 됐다.

지난달 8일 조흥은행 임시주주총회에 참석했던 주주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이날 주주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강원은행과 합병 승인이었다. 그러나 이날 ‘합병승인 건’은 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강원은행이 합병 과정에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강원은행은 올 초 현대종금과 합병하면서 발생한 청산소득에 대해 농어촌특별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97년 개정된 조세특례제한법이 정한 대로 합병에 따른 법인세를 감면받았지만 법인세 감면분 3943억원의 20%인 789억원의 농어촌특별세를 납부하지 않은 것이다. 납입 시한(2월12일·합병 등기일로부터 3일)을 이미 훌쩍 넘긴 상태였다. 강원은행은 결국 10%의 가산세까지 860억원에 이르는 세금을 물어야 할 처지가 됐다.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합병 과정은 세금 계산의 실수로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세금을 내고나면 1625억원이던 강원은행의 자산가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합병비율과 소액주주들의 주식매수 청구가격을 처음부터 다시 산정해야 할 판이었다.

“세금을 내라”는 국세청의 통보를 받고 강원은행은 “농특세 과세에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정경제부는 “농특세는 농어촌특별세법에 따라 반드시 납부해야 한다”며 반박했다. 한마디로 코미디에 가까운 해프닝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조세 전문가들이 충분히 검토를 했을텐데도 농특세 문제를 놓쳤다니 관련 법체계가 그만큼 복잡하다는 증거”라는 반응도 나왔다. 어쨌든 강원은행 사례는 한국 기업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신경하고 무지한지를 잘 보여준다.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국내에서도 기업 인수합병(M&A)과 분할 등 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 그러나 최근까지도 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에 대한 별도의 과세 원칙이 마련되지 않았다.

M&A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철저하게 비과세 원칙을 지킨다. 미국 국세법은 368조를 중심으로 일정한 요건을 갖춘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과세를 이연(移延)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조 조정이 소득 실현의 계기가 아니라는 법적인 판단이 100년 가까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기업 인수합병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해 97년말부터 조세특례제한법과 법인세법의 조문을 계속 뜯어고치고 있다. 새로 마련중인 세제의 가장 큰 특징은 ‘과세 이연(tax deferral)’으로 요약된다. 기업의 구조조정 작업은 소득이 이뤄지는 계기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

A사가 B사를 합병하면서 B사가 보유한 건축물의 대가를 B사 주주들에게 주식과 돈으로 지급했는데 이 금액이 시가보다 낮으면 어떻게 될까. 97년 이전까지 A사는 시가와의 차액(평가차익)에 대해 법인세를 납부해야 했다. 싸게 구입한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제는 개정된 법인세법에 따라 평가차익에 대한 법인세 납부를 이연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건축물을 처분하는 시점까지 과세가 무기한 연기되는 것이다.

또 사업 전망은 밝지만 이월결손금이 있는 기업을 인수하는 데 따르는 장애물을 없앴다. 매년 3억원 이상 이익을 올리는 컴퓨터업체인 C사가 유통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D사를 흡수합병한다고 가정해보자. D사는 사업전망이 밝지만 이월결손금이 약 5억원에 이르는 회사. C사는 과연 D사의 이월결손금을 승계할 수 있을까. 과거 법인세법에 따르면 대답은 ‘노’였다. 그러나 개정된 법인세법은 C사가 D사의 이월결손금을 승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태평양 법무법인 유욱(柳旭)변호사는 “새로 마련된 조세제도가 M&A나 회사분할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기간에 전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바람에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조흥―강원은행 문제도 새로 등장한 M&A 관련 조세법규를 기업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촌극이었다.

전혀 생소한 제도를 도입하다 보니 해석의 지침을 삼을 만한 선례도 거의 없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변형된 거래형식이 등장하면 더욱 헷갈리게 된다. 구체적인 사례마다 국세청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지 불명확한 측면도 있다. 전문가들은 “합병이나 분할을 원하는 기업들은 사전에 조세 문제에 대해 충분히 검토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순간 잘못하다가는 기업의 운명을 건 분할이나 합병이 수천억원의 세금 복병을 만나 물건너 가버릴 수도 있다.

〈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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