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市場의 법칙과 지역정서

  • 입력 1999년 7월 19일 18시 27분


『실패한 경영진은 퇴진해야 한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는 이런 엄청난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불확실성과 불가측성이 시장의 기본 속성이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경제적 선택에는 위험이 따른다. 시장은 기업의 합리적인 선택에 대해 이윤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선사하지만 불합리한 선택에 대해서는 파산과 퇴출의 고통을 내린다. 실패한 경영진은 물러나야 한다는 명제는 보통 경제학원론 교과서의 첫째 장에 등장하는 ‘만인공지(萬人共知)의 비밀’이다.

그렇지만 한경연의 엘리트 경제학자들께서는 여태 이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있었거나, 잘 알지만 말할 수 없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뒤늦은 ‘득도(得道)’ 또는 ‘득도의 고백’이 재계에서 일으킨 작지 않은 파문은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깨달음의 즐거움을 안겨 준다. “아하, 그렇군. 재벌기업의 경영진은 실패해도 퇴진할 필요가 없는, 그런 얼치기 시장경제를 해왔다는 말이지.”잘못으로 판명난 경제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떠넘기는 태도가 기업 경영진의 전유물은 아니다. 삼성자동차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모든 경제 주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행태를 보인다. 무엇보다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과 이른바 부산 지역정서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삼성그룹의 자동차산업 진출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허가하고 말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기업인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경제관료의 판단이 돈벌이를 직업으로 하는 기업인의 판단보다 더 정확하다고 볼 근거도 없다. 이건희(李健熙)회장이 벌인 자동차 도박의 성패를 선험적으로 단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한경연과 자유기업센터가 수호신으로 모시는 ‘하이에크 선생’의 말마따나 경쟁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삼성자동차가 치열한 국제경쟁을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누가 감히 확실히 예단할 수 있겠는가.

정부의 임무는 국제 자동차시장의 판도를 분석해 삼성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다. 삼성그룹의 총수가 자동차 회사를 만들면서 계열기업 주주들의 이익을 부당한 방법으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부당내부거래나 불공정거래를 통해 경쟁질서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법규를 엄정하게 적용하고 처리하는 데 있다. 삼성자동차의 퇴출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빅딜을 하든 매각을 하든, 법정관리를 거쳐 청산을 하든 일을 저지른 장본인인 이건희회장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정부는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이해관계자가 부당한 손해를 입거나 금융질서를 어지럽히는 불공정행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면 그걸로 족하다.

정부의 삼성자동차 처리방식이 옳든 그르든, 이 지역 출신 문민대통령과 삼성자동차 공장 유치에 가담했던 정치인과 지역단체들은 삼성자동차를 무조건 살려내라는 떼쓰기를 그만둬야 한다. 현정부가 삼성자동차를 부산에 강제로 떠맡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스스로 한 선택의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왜 남에게 덮어씌우는가. 부산지역 경제의 몰락이 부산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김대중 독재자의 정치보복’이나 ‘부산 죽이기’ 따위의 근거 없는 감정적 선동에 앞서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일말의 책임의식부터 표명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유시민(시사평론가)smrhyu@ms.kr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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