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84)

  • 입력 1999년 8월 2일 18시 30분


화실에서 출입구로 나가는 곳에 칸막이를 하고 소파를 두어 응접실로 썼는데 그가 거기 앉아 있었어요. 나는 처음엔 그를 못 알아볼 뻔했어요. 그가 경양식집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보이던 것과 같은 몸짓으로 의자 앞에 서있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아,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예 저 그것이… 정희씨가 알려 주더군요.

무슨 일이세요? 나 지금 아주 바쁜데….

하고 나면 보통 사람들 같으면 머리를 긁거나 약간은 주눅이 들어서 언제 바쁘지 않으냐 시간을 낼 수 있느냐 오늘은 그만 가보겠다든가, 하여튼 그런 식으로 나올 텐데 전혀 엉뚱하게 나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시간이 많습니다. 여기서 한가해지실 때까지 기다리지요.

오래 걸릴 텐데….

나는 짜증은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애기 엄마이고 그보다는 좀더 철이 들었다고 생각되었거든요. 그는 두꺼운 안경알 뒤에서 가늘게 눈주름을 잡고 웃고 있었어요. 뭘 숨기려고 한다든가 해보이지는 않고 선량한 것 같기는 해도 별로 서두를 것이 없다는 투로 어딘가 여유만만해 보였죠.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 달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는 못하고 그를 그냥 응접실에다 놔두고 화실쪽으로 돌아갔어요. 송영태란 사람이 정희와 관련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아주 자연스러운 느긋함에 나도 저절로 전염된 듯이 그에게 돌아가 달라고는 말하지 못했어요. 나는 학생들에게로 돌아가서도 처음엔 좀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입구 쪽을 돌아보고는 했답니다. 학생들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바깥 응접실이 내다보이는 데서 아직도 있나 하면서 힐끗 들여다보니까, 글쎄 송영태는 낡은 가죽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책과 종이며 사전이며를 벌여 놓고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쪽에서는 그의 굽은 등과 뒤통수가 보였는데요 굵은 반곱슬머리가 미친 사람 머리털처럼 사방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큰 가마가 보였죠. 그는 눈이 지독하게 나쁜지 안경을 쓰고도 사전을 코 앞에 바짝 대고 들쳐볼 정도였어요. 어쩐지 그가 오래 전부터 내 화실의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 공간의 원래 주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예요.

아이들이 차례로 돌아가고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일이 모두 끝났지요. 나는 잠시 빈 화실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서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검은 머리가 기웃하면서 안으로 고개를 내밀더군요. 나는 그게 아래층 주인이거나 무슨 외상값 받으러 온 중국집 소년이거나 뭐 그렇게 흔히 드나들던 무관한 사람인 줄로 잘못 알고 그냥 고개를 돌리며 물었어요.

무슨 일예요?

저요… 접니다.

어머,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쪽을 휙 돌아보았어요.

아직두 거기 있었어요?

그는 화실 안으로 슬슬 들어왔어요. 상의도 벗고 아주 셔츠 바람으로 제 집인 것처럼 말이지요.

왔다 갔다 하시면서도 절 못 본 모양이지요? 저는 줄곧 저기 앉아 있었습니다.

아, 미안해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어요.

커피라두 한 잔 주시겠습니까?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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