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187년에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한 후 모인 세번째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는데 실패했으며, 1198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주도한 네번째 십자군은 애당초 십자군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네번째 십자군의 발단이 된 것은 이슬람 세력의 취약부분이 이집트라는 사자왕 리처드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해군이 필요했다. 당시 그만한 규모의 해군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베네치아 공화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프랑크족 기사들이 베네치아의 앤리코 단돌로 총독을 방문했다. 단돌로는 은화 8만4000 마르크를 받고 1202년 6월24일까지 3만3000명의 사람과 말 5000마리를 수송해주겠다고 승낙했다. 그는 또 베네치아가 50척의 갤리선을 따로 내놓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여든을 훨씬 넘긴 단돌로는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언제나 팔레스타인인과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목적지가 이집트라는 것을 알면 많은 기사들이 십자군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십자군 지휘관들은 일부러 목적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때 베네치아의 외교관들이 카이로에서 이집트와 무역 협정에 대한 회담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이같은 이중 책략은 궁극적으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가 떠나기로 한 날 베네치아에 나타난 십자군의 숫자는 예상치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온 돈도 은화 8만4000마르크가 아니라 5만 마르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옛날에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아드리아 해의 자라를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십자군은 자라를 점령한 뒤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겨울을 보냈다. 그때 제위에서 쫓겨난 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안젤루스가 십자군에게 전갈을 보냈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자신을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혀준다면 예루살렘까지 가는 십자군의 비용을 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1204년 4월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알렉시우스는 이미 살해당한 뒤였고, 새 황제는 알렉시우스의 약속을 자신이 이행할 이유가 없다며 십자군의 요구를 거절했다. 분노한 십자군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메뚜기떼처럼 뒤덮고 살인과 강간을 자행했다. 그들은 심지어 소피아 대성당까지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이 네번째 십자군의 마지막이었다.
▽필자:존 줄리어스 노위치〓비잔틴 제국 역사 책 저술가(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1/norwich.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