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99)

  • 입력 1999년 8월 19일 19시 11분


비공개 지도부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비판한다면 이러한 시스템이 오히려 대중의 정세 판단을 가로막고 자발적인 운동 공간의 자생력과 확대를 막아왔다는 자책이 듭니다. 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가로막혀 있다 할지라도 대중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구심체로서의 대표조직인 학생회를 자주적으로 구성하고 호국단 폐지 투쟁을 동시에 벌여서 자율화 조치나 유화국면의 허위를 폭로했어야만 합니다. 사실상 현재의 유화국면은 광주학살 이래 돌이킬 수 없는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한 대외적인 제스처로서, 일 조 오천억 규모에 달하는 외채에 의한 전국적인 부도와 지난 여름의 외국 투자 완전개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 경제적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처방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학원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 그리고 일반 민중 속에 군사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 대중운동의 기초 조직이 되는 과 중심의 활동을 강화시키고 학생 개개인을 자발적인 선전 선동 활동의 주체로 내세우는 대자보와 유인물 작업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학생 대중조직을 장악한 뒤에는 이 열린 공간을 통하여 대학끼리의 연합투쟁을 조직해 나갈 것입니다. 대학들의 연합투쟁은 사회 속에서의 정치투쟁을 보다 극대화시킬 수 있으며 조직력이 보다 약한 대학의 대중운동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굵직한 목소리가 이어 나간다.

학원의 자율적인 민주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업이지만, 사실은 이를 통하여 변혁운동의 기본역량이 되는 민중을 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밖으로도 역량 배치를 해야 됩니다. 저들을 억압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측이 바로 현재의 독재정권임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 민중의 생존권을 옹호하기 위한 연대투쟁의 틀을 창출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어조가 분명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학생회는 예상대로 많은 학우들의 열성적인 참여에 의하여 그럴듯하게 복원 구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유신 말기부터 전위냐 대중이냐 하는 오랜 논쟁을 해왔는데요, 사실 이것은 이원적인 문제로 가려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대중들의 의식 수준에 맞추고 상황에 맞게 그들을 광범위한 동력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추수주의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전위가 그들에게 투쟁의 모범을 보이며 운동을 선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들 양자의 결합이 없이는 민주화 운동의 동력은 활성화되지 못할 것입니다.

송영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비공개 지도부의 맹점은 학원 내부의 조직 건설과 방향을 그야말로 소그룹 단위에서 유도하려고 했던 점입니다. 학생회가 학생대중을 이끄는 일상적 정치투쟁을 수행해야 한다면, 사회 속에서 투쟁의 이념과 목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선진적인 전위의 조직과 활동이 그만큼 더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자리에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의 구성을 제안합니다. 상반기의 운동선상에서 드러난 바와 마찬가지로 민주화 투쟁을 강도 높은 정치적 투쟁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조직과 노학연대투쟁을 전개할 조직을 상설기구로 끌어내와야 할 것입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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