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상문/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

  • 입력 1999년 8월 20일 19시 44분


며칠전 올들어 낮 기온이 가장 높다고 했던 날에 ‘높은 사람’이 주관하는 회의장의 뒷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회사 사장을 비롯해 연구기관장과 단체장이 40명 정도 참석한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보니, 당연히 에어컨 시설이 잘 돼 있는 건물인 데도 말 그대로 푹푹 찌는 것처럼 더웠다. 그런데 무심결에라도 누구 하나 양복 저고리를 벗으려 하지 않았다.

회의를 주관하는 곳에서 선풍기를 가져와 여기저기 놓고 돌려대기 시작하자 곧 막힐 것만 같던 숨통이 그래도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더웠다. 모두들 손수건을 꺼내들고 땀을 닦아대면서도 회의 주관자의 눈치만 살피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문득 그들 모두가 누구의 장례식에 와있지 않은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흰 와이셔츠에 무거운 색깔의 넥타이를 매고 검정색 계통의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장례식장이 아니고서는 그런 모습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더구나 그렇게 엄숙하고 우울한 얼굴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회의 주관자가 더운데 웃옷을 벗자고 제의하자 비로소 자동인형들처럼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들 모두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 소매 단추를 풀고 걷어올려야할 순서였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누구도 단추 하나 풀려 들지 않았다.

이때 내 머리에 이달 초 어느 잡지에서 읽은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한국과 일본의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두 사람에게 ‘당신 세대에 생각을 지배하는 키워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어 답을 받아 놓은 것이었다.

한국 작가는 “속도다. 어디를 어떻게 빨리 도달하느냐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 또래의 장래 문제에 대한 생각도 급하기만 하다”고 대답했다. 일본 작가는 “성향이 다양하기 때문에 답하기 어렵다. 나 또한 섬 같은 존재라고만 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내 눈 앞에 그려진 것들은 배꼽티와 통굽구두, 물들인 머리와 힙합바지 등등이었다. 상복같은 옷들과 속도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사이에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획일성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는 그 두 가지는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았다.

한 소녀가 배꼽티를 입으면 거의 모든 소녀가 같은 것을 입거나 입지 못해 가슴아파한다. 한 소년이 머리에 물을 들이면 다른 소년들도 그러거나 그러고 싶어한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유행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점잖게 보이려는 노력으로 상복 같은 옷들을 입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확실한 지도층임을 전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위선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틀리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식인 청소년들이 일본의 한쪽 문화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괴롭히던 더위도 슬슬 물러가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가을인, 이 가을에는 우리 모두가 다양한 색깔의 진실된 옷을, 우리 정신의 옷을 입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이상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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