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해 우리 신문들의 국제뉴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가볍다. 우선 해외 현지 취재팀의 수가 부끄러울 만큼 적다. 통상 10여 곳에도 못미치는 전략거점에 한 두명의 특파원을 두고 있었으나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그나마도 줄어들어 다섯 곳 안팎에 상주특파원을 파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신문들은 국제뉴스를 통신, 특히 세계 4대 통신사가 제공하는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 신문들의 국제뉴스는 세계 4대 통신사가 그들의 관점에서 취재한 뉴스를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강대국의 관점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통신사들이 제공하는 뉴스를 되도록 풍부하게 보도해주면 좋으련만 우리 신문들은 그런 배려마저 소홀하다. 국제보도에 주어지는 지면이 기껏해야 두 면이지만 그것마저 광고에 밀려 명색 뿐일 경우가 많다. 특히 동아일보가 그러하다. 예컨대 8월 두번째 주 국제면들은 전면광고에 밀려 한 면만 국제보도에 할애되었을 뿐이다. 신문사 내의 이른바 부서간 영토(지면)이기주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전면광고 때문에 쉽게 국제면을 희생시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보자. 9일자 A12면은 ‘왜 김희선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지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가로 15㎝ 세로 18㎝의 김희선의 사진을 곁들인 지면의 2분의 1 가량을 차지한 이 기사는 내보내면서 전면광고를 위해 국제면을 밀어낸 것이 그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나마 한두 면 밖에 안되는 국제면에 우리 신문들은 화제거리를 크게 다룬다. 클린턴 대통령이 은퇴 후 살 얼마짜리 집을 보고 다닌다느니, 대처 전 영국 수상이 모교인 옥스포드에 앙갚음을 했다는 등의 기사들이 지면을 채운다.
세계화나 지구촌시대를 강조하는 신문들이 이래서야 어떻게 명실상부하게 제 구실을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문들은 국민을 우물안 개구리로 만드는 꼴이다.
끝으로 몇가지 기사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6일자 A21면의 도쿄 심규선 특파원이 보낸 ‘피폭한인 위령비 이전…’제하의 기사는 균형잡힌 좋은 해설이었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그동안 ‘평화기념공원’안에 세워지지 못했던 사정이 일본측의 거부 때문만이 아니라 민단과 조총련 사이의 갈등 때문이기도 했다는 점을 밝혀주었다.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대일(對日)보도는 앞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18일자 A4면에 실린 ‘JP 2억7000만원 어디서 났을까’와 같은날 사설 ‘JP가 돌린 돈봉투’는 이른바 JP의 오리발에 대한 문제를 잘 제기해 주었다. 이 기사와 사설은 JP가 돌린 돈봉투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켰다.
19일자 ‘굿모닝 이코노미’ B1면에 실린 ‘대기업 골프장건립 부실화 전주곡인가’는 인과관계를 견강부회한 잘못된 내용이었다.
유재천(한림대 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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