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게도 복학하자마자 대학원에 진학을 했지. 하지만 지금은 수료를 하게 될 지 의문이야. 그런 말이 있잖아. 세계를 해석할 게 아니라 변혁시켜야 한다고. 지금은 아무도 자유스럽지 않아.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 나중에 세상이 변하고 나면 우리 세대의 삶들은 까마득하게 잊혀질지두 몰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작은 힘들을 서로 보태고 더 크게 만들어서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해.
나는 겉으로 짜증을 내지는 않았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송영태씨, 너나 잘해. 나는 내 할 일을 할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가 좋아. 참견하려구 하지말어.
송이 두 손바닥을 쳐들어 내 말을 막으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아 그래 잘 알겠어. 윤희씬 좋은 그림을 그려.
점 점… 좋은 그림이 어딨니 임마. 그냥 그림이지. 너 앞으로 조심해.
뭘 조심할까요, 마님?
자기 안에서 부족한 걸 메꿀려구 서두르지마라. 그럼 무리하게 돼. 특히 넌 쓰잘데없이 아는게 많구, 부잣집 아들이니까 명심해야 할거야.
최미경이 식탁을 가볍게 톡 두드리며 종알거렸다.
그건 말이 되네.
한 형 이젠 화가 좀 풀리셨수?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이젠 돌아가지 그래. 바깥에 택시 많아. 미경씨와 나는 어차피 밤을 샐거니까.
아이구 살았다. 난 일어설게.
송영태가 홀가분하다는 시늉으로 두 팔을 번쩍 쳐들어 보이더니 최미경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 문디 가시나야, 아침에 해장까지 아예 신세를 져라. 학실히 개겨야 인상에 남지.
아직도 비는 같은 흐름으로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가을 장만가. 아마 이 비가 걷히면 날씨는 제법 쌀랑해지겠지. 영태가 가고난 뒤에 나는 도어를 잠그고 화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미경을 좀 풀어 주고 싶어졌다.
술 더 할래? 위스키 남은 거 있는데….
전 됐심더. 언니 더할라꼬요?
아니, 따끈한 커피 한 잔은 어때?
좋지예. 아까는 무서워 혼났어예. 진땀이 확 나든데.
내가 커피 잔을 들고 돌아오니 미경은 엘피 판을 고르고 있었다. 그네는 조심스럽게 판을 얹었다. 나는 잔 두 개를 식탁 위에 얹고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 위에 커튼을 쳤다.
바람이 안좋습니꺼?
그게 아니라, 아침에 소음이 심할 거야. 빛두 싫구.
우리는 잔을 두 손에 감싸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내가 불쑥 그네에게 먼저 물었다.
법대에선 뭘 배우는데?
제도를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가를 배웁니더. 내 뜻은 아니고 아부지가 우겨서 그렇게 된거라예. 우리 아부진 말단에서 과장까지 올라간 공무원이라예. 말도 한마디 없고예. 안돼, 하면 그걸로 끝입니더. 고골리 소설 등장인물처럼 음산합니더. 지가 맏딸인데예… 큰 탈이 났심더.
송 형 하구는 어떻게 알았어?
우리 동아리에 가끔씩 와서 토론을 지도했는데예, 이번 여름에 공장에 같이 갔다 왔거든예.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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