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재순/장면박사 탄생 100년을 맞아

  • 입력 1999년 8월 25일 18시 42분


나의 책상머리에는 장면(張勉)박사가 쓰신 덕유만사성(德有萬事成)이란 휘호 액자가 걸려 있다. 장박사가 부통령 시절 비서관이었던 이성모(李聖模)형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다. 이 글귀를 근 40년 동안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

금년은 장박사가탄생한지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서거하신 해가 66년이니 유명을 달리한 지도 어언 33년이 됐다. 세월이 이만큼 흘러가는 동안 장박사와 제2공화국에 관한 세평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에 씻길대로 씻겨 장박사의커다란업적이 뚜렷이 부각돼 큰 바위처럼 남게 됐다.

장박사의 인격과 처음 접했던 것은 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당시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이 버스에 탄 채로 끌려가던 무소불위의 이승만정권 시절, 나는 구국호헌(救國護憲)의 기치를 들고 학생시민 데모에 앞장섰다가 관헌에 체포돼 3개월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왔다. 그때 내가 찾은 곳은 장박사가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교부들의 신앙’을 집필하던 곳이다. 그후 신당(민주당)창당, 5·15와 3·15정부통령선거 그리고 4·19의거와 제2공화국, 5·16에 이르기까지 장박사 슬하에서지냈고사사롭게는나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주셨다. 장박사는 내게 인생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장박사는 미군정때 입법의원으로 계시면서 이 나라의 건국 이념을 자유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뿌리를 심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좌익 공산세력은 물론 사상적인 중간세력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장박사는 제헌의원으로서 유엔으로부터 한국 승인을 받아 내는 일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됐던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국 대표단 수석이었던 장박사의 활약은 같이 갔던 조병옥(趙炳玉)대표나 김활란(金活蘭)대표 등이 한결같이 ‘초인적인 외교역량’을 발휘했다고 두고두고 회자했다.

6·25 공산군 남침은 소련의 앞잡이로서 동족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긴 김일성 괴뢰집단의 씻지 못할 민족반역이었다. 주미대사였던 장박사에게 본국으로부터 날아온 전보는 ‘당신 한사람의 역량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소’라는 것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에 빠진 순간이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거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파병명령을 내리기까지 장대사는 본국과의 통신이 끊어진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며 각국 대사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장박사는 야당시절 가는 곳마다 끊일 줄 모르는 미행, 물샐틈없는 감시와 갖은 방해, 공포분위기, 급기야는 공공연한 테러를 당했다. 젊은 학도들의 정의로운 의거 4·19, 그 신선하고 거룩한 피의 대가로 탄생됐던 제2공화국은 8개월만에 묻혀지고 말았다. 비정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던가. 연천(年淺)한 이 나라 민주정치가 연륜을 쌓아가기 위한 역사적 과정이었던가. 힘으로 다스리는 방도를 모르셨을 리 없었다. 장박사는 민중의 양식을 믿었기에 혼란 속에서 질서가, 원심적 분해 속에서 구심적 핵심이 반드시 형성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제2공화국은 어둠의 한국 현대사에서 빛나는 작은 보석”이라고.

21세기 문턱에서 장박사가 떨어뜨리고 간 작은 보석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도한다.

김재순<전국회의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