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런 재산을 축적해온 과정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음지 사람들의 뼈저린 신산(辛酸)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접촉해 왔으리라는 짐작에서 선행의 단초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들이라 해서 세속적 욕구나 애바르게 모아온 재산에 대한 소유욕이 없을 리 없고, 유산을 물려줄 멀쩡한 후손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재산을 사회에 던지는 길을 선택했다면, 또다시 선택을 위한 주저와 갈등을 경험했을 법하다. 그것은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사려깊게 헤아릴 줄 아는 통찰력을 터득한 삶을 살아온 결과였다. 좌절의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의 아픔이 얼마나 처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선택은 그래서 보석보다 더욱 빛나고 값지다.
우리들의 터키가 바로 이 시각 그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남한땅에 버금가는 면적에 살던 사람들이 대재앙을 만나 숨가쁘게 허덕이고 있다. 걷어낼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참상의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부끄럽다. 6·25전쟁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하여 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나라가 터키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그 한가지 만으로도 우리는 터키에 빚을 지고 있었음에도 빚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50년을 배포 좋게 살아온 셈이다. 참전을 계기로 터키 국민의 한국 짝사랑은 남다르고 광범위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전쟁과 재해, 그리고 끊임없는 국가변혁에 부대끼고 시달려온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고통도 삭이고 뿌리치기가 손쉽지 않다. 지난 번 수해로 우리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수렁도 심상치 않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들만큼 이웃나라 먼 나라 할 것 없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빚은 고통받고 있을 때 갚아야 가치가 더욱 돋보일 것이고, 고통과 질곡을 경험했던 사람만이 남이 겪고 있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재난을 당하여 절망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마음 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어째서 일본에 대해 희석되지 않는 배신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이웃나라의 백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고통과 죽임을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올곧은 반성이나 배상을 외면하고 있는 간교함 때문이다.
그렇다면 터키는 먼 나라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고 그 이웃이 지금 폐허의 잔해 위에서 갈피 잡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터키를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김주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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