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찍어라 응?
잘 하다가 왜 그래.
습관 들일까봐 그런다.
기왕 시작한 건데…끝까지 쳐주면 어때?
나는 못들은 척하고 비켜나 다른자리로 가서 앉았다.송영태가 다시 두꺼운 안경알을 원고에 대고 몇 자 읽고는 외다리타법으로 찍어나갔다.
안녕!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날따라 치마를 입은 최미경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쟤가 왜 안 나타나나 궁금했잖아.
언니 오햅니더. 지는예 아무 약속도 안했심더. 언니 보고 싶어서 왔어예.
송영태가 살았다는 듯이 미경에게 물었다.
야 너 타자 칠 줄 아냐?
나도 형 정도의 실력이라예.
영태가 끙끙거리며 한참을 쳤지만 절반밖에 해내지 못하고 작업을 그쳤다.
도저히 안되겠는데. 내가 치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아.
나는 할 수 없이 그를 밀쳐내고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았다.
그러니까 다음부터 글은 간단간단하게 요점만 간추려서 쓰란 말야.
내가 재빠른 솜씨로 타자를 쳐나가자 미경이 옆에서 탄성을 질렀다.
우와, 언니 솜씨가 굉장하네예.
횃불 일호는 한 시간여 만에 다 끝났고 송영태는 원본을 추려서 복사기 앞에 가서는 혼자서 설명서를 들여다보면서 꿈지럭대더니 한부씩 제작해내기 시작했다. 미경이 복사본을 받아서 페이지 순서대로 호치키스로 찍어서 제본을 했다. 팜플렛의 꼴이 유인물과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해 보였다.
작업이 모두 끝난 뒤에 영태는 준비해 왔던 보스턴 백에다 팜플렛을 쑤셔 넣었다. 모두 이백여부쯤 되었을까.
자아, 나는 먼저 간다.
그는 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이 화실에서 나갔다. 최미경은 백에서 준비해 온 김밥을 꺼내어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점심을 아직 안했어예. 요 건너 시장에서 샀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별명이 콩자반이라면서?
미경이는 호탕하게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웃어댔다.
얼굴이 까맣다고 안 그러는교. 첨에는 평범하게 깜둥이라고 했다가 콩자반이라고 부릅디더.
나는 그 별명이 미경이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 야무지고 똘똘한 행동거지에 걸맞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네에게 물었다.
저 팜플렛을 계속해서 만들 작정이니?
어떻게 아셔요?
지금 일호라니까, 이호, 삼호, 계속할 거 아냐?
글쎄, 한 십호까지 무사하게 제작을 했으면 싶은데예.
저 정도 부수라면 대중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언제예, 각 대학 동아리 단위로 배포할 겁니더. 현재의 민투위 단계에서 전국적인 투쟁연합으로 갈 작정이니까요.
나는 저절로 픽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젠 목까지 깊숙이 빠져버렸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꺼?
안 그러니? 느이들 여기서 계속 제작할 작정 아냐. 그러구 내가 타자두 쳐 줘야 할 거구.
그래도 최미경은 제작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빼고 말했다.
저도 지금 연습 중인데예 타자 치는 속도가 늘고 있어예.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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