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11)

  • 입력 1999년 9월 2일 18시 25분


좋소, 조 형은 지금 뚜렷하게 운동에 기여할 역할이 없어요. 너무 알려졌을뿐만 아니라 잠수함으로서도 유용한 점이 없습니다. 지금 형이 찬동하고 참여한 투위는 구성 선포와 동시에 곧장 행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사실 이번 일은 본격적인 싸움이 아니라 선전 선동을 주안점으로 하는 사업이거든요. 조 형이 운동의 거름이 되겠다 생각하고 치고 나가면 조직은 성과를 거둡니다.

해야죠 뭐.

눈썹이 대답하자마자 송영태가 상 위로 손을 내밀었고 그들은 악수했다. 눈썹의 일행이며 내 화실의 모임에 왔었다는 순진남이 그들 손에 자기 손도 얹었다.

나두 조 선배하구 같이 할거요.

나는 어쩐지 그들에게 아까보다 훨씬 더 미안해졌다. 그래서 혼자서 맥주만 소리없이 마시고 앉아 있었다.

그들과 헤어져 영태가 나를 화실로 데려다 주노라고 함께 길을 건너 걸어 왔는데 나는 그에게 얼른 말해버렸다.

나두 뭔가…도와줄게.

송영태는 두꺼운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번화가에서 마치 얌전한 월급쟁이처럼 보였다.

우린 벌써 시작했잖아.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뭘 말야, 뭘 시작했는데?

한 형은 벌써 선전부에서 일하구 있지 않았나?

나는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분개해서 중얼거렸다.

이런 순, 나쁜 놈들 같으니!

18

팔십 사년 가을부터 새로운 목소리로 시작된 윤희의 노트를 나는 처음엔 읽지않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네의 말처럼 삶이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윤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이건 아마도 갈뫼에서의 우리들의 것 보다는 더 생활의 냄새가 나는 만남이 되겠지.

그 무렵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담벽 안의 미물들과 정을 통하고 그리고 스스로 가슴 속에서 지워 버리면서 차츰 옷장만한 공간에 길들여져 갔다. 내 원칙은 무엇이었던가.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 가겠다고 다짐했지. 나는 이제 겨우 그 길의 초입에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없는 동안은 저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견디는 일도 조금은 보탬이 될지도 몰랐다.

단식투쟁을 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한 서른 번쯤 했을까. 사일구니 오일팔이니 해방절이니 무슨 국보법철폐니 무슨 양심수 처우 개선이니 하면서 해마다 제 철이 되면 행사 삼아서 하던 단식은 길어 봐야 사나흘 또는 일주일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런 단식은 요란하고 표나 나지. 단식을 통고하고 준비된 성명서를 읽고 밖으로 향한 화장실 창살에 매달려서 표어처럼 단어 마디가 딱딱 끝나는 문장으로 샤우팅을 하고 투쟁가를 부르고. 목이 가라앉고 침이 마르면 식기를 가져다 창틀에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이쪽이 비상사태임을 전 사동에 알리고 마지막으로 감방의 철문을 발로 차기 시작한다. 발뒤꿈치로 내지르다가 아프고 힘에 부치면 빗자루나 양동이로 두드리기도 한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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