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과 구별되지 않는 취향 사고 의식 스타일이 개인들을 마취시키고 좀먹는다. 문화적으로 복제된 사람들은 집단 속에서만 자신을 발견할 뿐 자아는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자아란 모호하고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불분명한 형체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은, 그 모습은 달리한다고 해도 본질에서는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이들이 이미 체제에 의해 다스려질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차이’가 비롯되는 곳에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타인들과 모든 점에서 구별된다는 점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우리의 내면은 외모만큼도 다양하지 않은 것 같다.
획일성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문화의 빈곤’ 현상은 상업주의의 책임도 있지만 작가들의 책임 또한 큰 것 같다. 너무도 많은 작가들이 대중과의 타협이라는 안이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 보장된 것은 일시적인 각광 후의 영원한 도태일 뿐일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너무도 예쁘고 단정한, 그래서 보기 흉한 작품. 또 희망만을 주입하는, 그래서 부담스럽고, 또한 의심스러운 글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이 세계에 엄연히 공존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악에 대해, 어둠에 대해 말하는 작품, 하지만 선의 이름으로 예사롭게 재단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리라는 기대를 처음부터 저버리고 들어가는 작품들 또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작품과 글들이 수용되는, 소수 집단의 문화가 곳곳에서 설 자리를 찾아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사회가 오히려 건강하고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대중의 인습적 사고를 파괴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람직하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작품을 만드는 데 대중을 미리 의식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대중의 몰이해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까지도 각오하는 그러한 작품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표현의 자유는 무제한은 아니라도 가능한 한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설사 사회에 독소를 끼칠 정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법이 아닌 대중의 수용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면돼야 할 것이다. 지탄을 받아 마땅한 작품에 대한 기준과 관련해 사회는 좀더 관대해져야 할 것이다. 포용력은 한 사회의 성숙도의 지표이기도 하니까.
개인적으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려 한다. 내 사고와 의식을 규제하는 도덕 윤리 제도 등이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것들을 거스르고 위반하는 힘을 길러 준 한에서였다. 나는 아직도 다 벗어버리지 못한, 내가 얇게 걸치고 있는 인습과 도덕이라는 이 거추장스러운 낡은 의상을 찢어버리고 완전한 알몸이 되고 싶다.
육성만이 본질적인 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 설사 그것이 사람들의 귀에는 중얼거림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영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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