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부터 소문은 떠돌았다. 대우 다음엔 어디래? 현대라던데. 그 다음은? 삼성이라잖아. 소문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신화의 주인공들이 무너지고 있다. ‘월급쟁이 신화’를 남긴 성장시대의 영웅 김우중(金宇中)회장도, ‘바이 코리아’펀드로 증권계의 기적을 이룬 이익치(李益治)회장도 더 이상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평생을 ‘일벌레’로 살아온 김회장으로서는 자신이 키워온 대우기업들이 사실상 부도와 다름없는 상황에 이른데 대해 참담함과 함께 억울함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총수 혼자 수십개의 바둑판을 놓고 계속 뛰어다니며 한 점 한 점을 놓는 다면기(多面棋)식 경영은 불가능한 시대다.
이익치현대증권회장의 신화는 IMF상황에서 이뤄낸 것이어서 더욱 드라마틱했다. 한국경제는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과 이익치회장이 끌고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바이 코리아 펀드로 증권시장을 급성장시키고 있는 동안 그 이면에서는 주가조작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반 투자자들은 놀랐다.
현대사건의 경우 법원의 판결이 있기전에는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우리나라도 증권시장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상황이니 만큼 그 시장의 룰과 기본윤리를 엄격히 지켜야 자본주의를 할 자격이 있다는 것만큼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익치회장은 정주영(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한창 사업을 키우던 시절 초대 그룹회장비서실장으로 정회장을 모신 경력 때문에 그의 저돌적 경영스타일은 정회장의 그것을 빼닮았다는 게 중평이다. 여기에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번 현대사건에서 주목되는 것은 계열사에서 2200여억원이나 되는 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외국의 기업군과는 달리 그룹내 기업들이 독립적 경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업간에 쉽게 돈이 오갈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전형적인 한국재벌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금감위 검찰에 이어 국세청도 재벌개혁의 전면에 나섰음을 천명한 것이 2일 국세청장의 기자회견이다. 안정남(安正男)청장은 이 회견에서 삼성 이건희(李健熙)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사함으로써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현대 다음은 삼성’이라는 수순을 확인해준 셈이다. 사실 이회장이 아들 재용씨에게 거액의 변칙상속을 해줬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재용씨는 아버지로부터 60억원을 받아 삼성계열사의 비상장주식을 매입, 상장후 엄청난 차액을 남기는 등의 수법으로 3년만에 3조원의 재력가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어디에서 무슨 사업을 한들 이런 고수익을 올릴 수 있겠는가.
이래서 재벌이 개혁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아진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어번 국세청장의 회견내용을 보면 ‘옳은 것’에다 정치적 의도를 끼워넣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웬만해서는 기자들의 요청이 있어도 회견을 않는 청장이 회견을 자청한 것이라든가, 개별그룹이나 기업에 대해서도 세무조사 가능성을 직접 밝히지 않는 관례를 깨고 불쑥 이건희회장에 대한 조사 가능성을 꺼낸 것이 그예다. 특히 재벌기업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90평이상 아파트입주자에 대한 자금출처조사방침을 밝힌 것은 인기주의(populism)의 냄새가 짙다. 재벌과 돈많은 사람을 요란스럽게 때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서민 중산층을 위한다는 정부 정책을 한층 부각시키고 인기를 얻겠다는 계산일 법도 하다. 예정된 개혁프로그램이 있으면 조용히 시행해나가면 된다. 너무 목소리를 높이면 듣는 사람도 짜증이 난다. 국민회의 이종찬(李鍾贊)부총재의 말대로 국민은 이제 개혁이란 말에 지쳐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재벌이건 권벌(정당)이건 왕회장식 황제경영체제는 사라질 때가 됐다. 경제건 정치건 민주화와 투명성 제고가 개혁의 요체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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