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사이비 자유주의를 경계한다

  • 입력 1999년 9월 6일 18시 34분


8.15 경축사를 기점으로 정부가 재벌개혁 대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상장 특혜시비와 편법상속 의혹 때문에 시민단체의 강력한 비판을 받는 가운데 국세청은 상속과 관련한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정주영 회장의 아들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때문에 검찰에 소환될 것같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대우 계열사 워크아웃과 구조조정이 끝나면 김우중 회장이 퇴진해야 한다는 견해를 공공연히 밝힌다. 계좌추적권까지 동원해 부당내부거래를 뒤진 공정거래위원회는 LG와 SK를 포함한 5대재벌에 각각 수백억 원씩 과징금을 물릴 방침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비시장적 수단에 의한 재벌해체 시도’라고 비난하자 정부는 재벌해체 의도가 없다고 발을 뺐다. DJ의 ‘색깔론 콤플렉스’를 이해는 하지만 이건 사실 우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定議)에 따르면 재벌은 “복수의 시장에서 독과점 기업을 포함한 다수의 외형상 독립적인 기업을 총수와 그 가족이 배타적으로 소유 통제하는 기업집단”이다. 편법상속과 내부거래 근절, 부채비율 감축, 책임경영과 무능총수 퇴진, 소액주주권강화,재벌의 금융기관 지배 억제 등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집행한다면 기존의 재벌체제가 그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이니 해체니 용어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제는 수단의 적법성과 실질적인 결과다. 현재 검찰과 국세청, 금융감독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는 법률이 부여한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많이 바뀌면 개혁이요, 옛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달라지면 해체가 될 것이다. 이런 점은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지식인들도 다 안다.

법률적 하자(瑕疵)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본주의 기본원리’라는 무척 ‘심오하고 철학적인’ 쟁점을 내세워 정부를 공격한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들의 무기는 ‘재산권론’이다.

예컨대 작가이며 경제평론가인 복거일씨는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4백만 주 출연과 관련해 우리 언론이 ‘경제적 자유의 핵심인 재산권 보호에 관심이 없다’고 질타한다.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삼성차 부채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는 이회장의 사재 출연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사재출연 강요는 자본주의 원칙을 저버린 집단적 약탈행위’라는 자유기업센터 공병호 소장의 과격한 선언 앞에서 대한민국은 졸지에 떼강도가 설치는 무법천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정치권의 바람잡이들은 이런 말씀들을 재빠르게 끌어다 색깔론 공세에 날개를 단다.

이런 분들에게는 고전적 자유주의자 J.S. 밀이 ‘경제학원리’에서 했던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근대 유럽의 사회체제는 근로소득이나 정당한 분배의 산물이 아니라 정복과 폭력의 산물인 재산분배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재산권법이 사유재산을 정당화하는 원리에 부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 재벌총수 일가의 사유재산은 과연 근로소득이나 정당한 분배의 산물인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들의 재산은 절대적 신성불가침인가? 정부와 시민단체가 정말로 재벌총수의 사유재산을 빼앗았다면 그 실력있는 고문변호사들은 다 놀고 있단 말인가?

진짜 자유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권력 집중에 반대한다. 재벌이라는 민간 경제권력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재벌을 옹호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만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유시민<시사평론가> s2smrhyu@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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