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항/한국호랑이에게 빚진 것

  • 입력 1999년 9월 6일 18시 34분


호랑이는 한국 민족의 삶에 녹아 있는 동물이다. 한반도의 지도는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만큼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 속담이 풍부한 나라는 없다.

그렇지만 한국이 호랑이의 멸종을 막기 위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호랑이 멸종에 크게 기여한 나라로 꼽힌다. 밀렵꾼이 잡은 호랑이 뼈로 만든 한약 제품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호랑이를 그리 대접하다보니 호랑이가 이제 우리의 산하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호랑이는 카리스마를 지닌 동물이다. 그 위엄과 용맹함으로 한국 호랑이의 서식지는 우리 조상들이 활동했던 무대인 한반도 만주 아무르 강 유역과 일치한다.

모든 한국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호랑이와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호랑이 백두산호랑이는 이름만 다른 같은 종이다. 러시아와 중국에 야생 호랑이가 생존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동물원에는 야생 상태에 있는 호랑이보다 더 많은 한국 호랑이가 생존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 동물원들이 야생동물 보전 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전 세계 동물원들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수용해 보전하면서 혹시 야생에서 이들이 사라지더라도 훗날 자연 환경이 회복됐을 때 사라진 야생동물도 복원시킬 수 있는 명맥을 잇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물을 가두어 놓고 시민들에게 구경시키는 것이 동물원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다. 현대 동물원의 주기능은 자연 상태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야생동물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언젠가 다시 자연으로 복귀시킬 수 있도록 그 명맥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들은 세계동물원기구(IUDZG)라고 하는 국제적 조직을 만들어 회원 동물원 사이에 멸종위기종의 효과적인 보전을 위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협력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동물원인 서울대공원 동물원은 아직 이러한 국제기구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여기에는 동물원을 시민들의 휴양시설 정도로만 생각하는 서울시의 책임도 크다. 서울시는 호랑이에게 빚진 것이 많다. 서울시는 얼마전 서울시의 캐릭터로 왕범이를 정했다. 호돌이 호순이를 마스코트로 사용한 88올릭픽의 주최도시는 서울시가 아니었던가. 미국의 석유회사 Exxon은 회사의 마스코트로 호랑이를 사용한다. 이 회사는 마스코트인 호랑이 보전사업을 위해 연간 100만달러 이상을 기증하고 있다. 일종의 로열티인 셈이다. 서울시도 한국 호랑이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

얼마 전 서울대공원과 서울대학교가 야생동물을 보전하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공동으로 서울대공원 내에 야생동물 보전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서울시가 야생동물 보전사업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서울시는 동물원의 일차적 기능이 시민의 휴식이 아닌 야생동물과 자연환경의 보전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 항(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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