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문화」 어디에 있나?

  • 입력 1999년 9월 7일 19시 34분


‘문화’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 가운데 하나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며 앞으로 문화가 엄청나게 중요해질 것이라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서울의 얼굴인 세종로 문화관광부 청사에 크게 걸려 있는 표어도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다. 이처럼 다들 기회있을 때마다 문화를 외치지만 우리에게 문화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없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지 모른다.

문화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아오면서 언제 우리가 문화에 눈돌릴 여유가 있었던가. 형편이 나아진 다음에는 먹고 노는 일에 더 몰두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마당에 곧 ‘문화의 세기’가 다가온다는 전망은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문화의 세기’가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와 주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문화역량을 배양하는 데 나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다음에 ‘문화의 세기’가 찾아와야 다른 나라와 최소한의 경쟁이라도 벌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문화의 세기’가 오고 안오고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 정말 딱한 노릇이다.

여기에 우리 문화가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은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문화의 위기는 몇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문화 기반의 붕괴다. 문화 종사자들이 급속히 빠져나가고 애써 가꿔놓은 문화토양들이 유실되고 있다. 경제위기 이전부터 감지되어온 현상이다. 인사동 대학로 같은 몇 안되는 문화거리가 급속히 퇴색하고 있는 것이 상징적인 예다. 문화공간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가 술집 카페로 대체되고 있다.두번째는 미국과 일본 문화의 영향권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현상이다. 문화를 즐기는 세대들이 미국 할리우드영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매료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눈에 띄게 빨라지는 문화편입 속도다. 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열광은 새로운 문화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세번째는 사이비 문화의 창궐이다. 문화의 특성상 주류 문화가 맥을 못추면 진짜를 가장한 가짜문화가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IMF체제 이후 바짝 조여졌던 사회적 긴장감이 느슨해지면서 음란 외설 폭력성 문화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실로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입법부는 갈길 바쁜 문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원인은 한마디로 문화인식의 부재다. 5년째 계속되고 있는 여야의 통합방송법 줄다리기는 그중 ‘압권’이다. 위성방송 등 21세기 뉴미디어 시대에 대비하는 것은 문화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다. 그러나 여야는 지루한 탁상공방으로 우리 방송영상 산업의 시계를 몇 년 뒤로 돌려 놓고도 여전히 소속 정당의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다. 그사이 벌써 3호까지 발사된 무궁화위성은 활용할 법적 근거를 얻지 못한 채 한반도 상공을 헛돌고 있다.

존속시키는 건지, 마는 건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스크린쿼터 정책도 마찬가지 사례다. 스크린쿼터를 폐지하거나 아니면 현행대로 유지하는 문제는 정부가 소신껏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정부의 태도로 인해 문화계에 극심한 혼란만 야기되고 문화창조에 쓰여야 할 에너지가 반대운동 등 다른 곳에 낭비되고 있다.

문화산업 육성책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와 산업의 결합체인 문화산업은 ‘문화’와 ‘산업’ 양쪽에 고르게 비중이 주어져야 말 그대로 ‘육성’이 이뤄질 수 있다. 정부의 문화산업 육성책은 주로 산업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상대적으로 취약한 문화 분야에 대한 보완대책이 엿보이지 않는다. 하드웨어만 있지 소프트웨어가 없는 ‘속빈’ 육성책이다.문화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각 나라의 치열한 경쟁은 ‘전쟁’의 단계까지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기에 맞서려면 치밀한 장기전략 아래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정치와 정부가 문화에 훼방을 놓거나 외면하고 있다. 이러고도 ‘문화의 세기’를 외칠 수 있는가.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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