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자본주의여, 인간의 얼굴을 보여다오

  • 입력 1999년 9월 13일 18시 33분


고교도 겨우 졸업하고 미국 네바다주 스프링필드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별로 똑똑치 못한 안전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호머 심슨. 미국 폭스TV의 인기TV만화 ‘심슨가족(The Simpsons)’의 따뜻한 가장이다. 똑똑한 여성 마지의 남편이자 엉뚱한 아들 바트, 미국 엘리트를 대변하는 딸 리사, 젖먹이 매기의 아버지다.

주류에 끼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주류에서 밀려나 있는 호머는 말한다.

“한 번이라도 ‘옳은 줄’에 서고 싶어. ”

치열한 경쟁 속에 승자가 됐다는 성공담이 각광받는 미국.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사회의 낙오자라 할 수 있는 호머가 사랑받는다. 호머는 종착역을 모른채 새밀레니엄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적 물음 그 자체일 수 있다.

▽빌 게이츠 대 홍대리&호머〓빌 게이츠나 야구선수 박찬호, 억대 연봉 펀드매니저들의 성공신화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위대함에 감격한다. 그러나 만화 ‘천하무적 홍대리’ 주인공의 통쾌한 회사생활에도 갈채를 보낸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의 양면성을 설명했다. 어리숙한 인물의 경직되고 모순된 행위를 보면서 느끼는 우월감에서 웃음이 나오고 역으로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육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호머와 홍대리는 베르그송의 설명을 넘어선다. 하루하루를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잠재돼 있는 불만과 기대를 대신 표출해 주는 데서 느끼는 대리만족이다. ‘인간의 냄새’에 대한 그리움의 반영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올 초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제시된 화두다. 국가개입 최소화, 시장개방, 자본이동의 자유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시점에서 ‘인간’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 측면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사적 영리 추구의 경쟁을 통해 공익에 기여한다던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장애물을 만났다. 사회구성원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편집위원 출신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공동저작인 ‘세계화의 덫’에서 세계화가 전세계를 20% 사람들만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캐나다 오타와대 미셸 초스도프스키 교수(경제학)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빈곤의 세계화’라고 비난한다.

이런 와중에 98년 노벨경제학상이 후생경제학을 주장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아마르티야 센 교수에게로 돌아간 점은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는 부의 재분배, 윤리, 복지, 민주주의 등을 역설한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제3의 길’,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새로운 중도’,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의 ‘쇄신 좌파’ 등 대안들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기존의 서유럽이나 사회주의식 사회안전망을 유지하고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다.

▽행복이란〓우리는 왜 자본주의사회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었는가?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답을 ‘행복’이라고 배워 왔다.

육체적 만족보다 이성적인 인간의 정신적 가치 실현을 행복으로 여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데카르트로 이어져온 서양의 전통이다. 동양철학의 유가나 도가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삶의 궁극적 목표로 했지만 육체의 욕구에 대한 억압은 서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체의 욕구를 긍정한 것은 근대 이후였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은 행복이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쾌락, 즉 자기욕구의 만족이라고 주장하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역설했다. 자본주의는 쾌락과 만족을 계량화해 정책에 반영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각자가 사적 영리를 추구하며 역할을 다할 때 사회 전체의 선(善)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실사회에서는 사적 영리의 추구가 사회 전체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며 반성했다.

어쨌거나 시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밀레니엄의 기로. 구조적으로 낙오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얼굴’을 갖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호머는 ‘리사를 의식하며 마지의 품에 안겨’ 바트와 함께 외친다.

“사장이 내 이름도 모르다니.”

김형찬기자 khc@donga.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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