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외국인의 97%
100년 넘게 한국땅에서 살아왔지만 여전히 차별대우 속에 말없이 살아가는 화교(華僑)들. 그들이야말로 한국 속의 ‘권희로’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8월31일 현재 법무부에 등록된 국내거주 외국인은 90일 미만의 단기체류자 20만9000명을 포함해 179개국 36만8184명. 장기체류자 15만9184명 중 거주자격이 주어진 외국인은 2만2642명(141개국)이며 이 가운데 화교는 2만1983명으로 전체의 97%를 차지한다.
▼화교의 역사▼
1880년대 일본이 한반도를 공략하고 나서자 인접국으로서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 정부가 한반도에 대한 연고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국민을 한반도로 이주시킨 게 계기였다. 이들은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화상조계(華商租界)’를 형성,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화교인구는 해방직후 중국 내전을 피해 산둥지역에서 대거 피란오면서 한때 10만명을 넘기도 했고 인천 선린동, 서울 소공동 등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그러나 6·25전쟁과 두 차례 화폐개혁을 거치며 화교는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화교들이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하면서 ‘차이나타운’까지 모습을 감춰버렸다.
◆곳곳 보이지 않는 차별
▼화교가 죄인가▼
한중(韓中)수교후 화교에 대한 법적 제도적 불이익은 상당히 줄었다. 우선 지난해 7월 외국인 토지소유제한이 해제돼 화교들도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게 됐다. 올 2월에는 장기체류 외국인 지문채취대상이 17세에서 20세 이상으로 상향조정됐다. 거주지 등록기간도 3년에서 5년으로 늘었다. 최근에는 이들에게 지방선거에 한해 참정권을 준다는 방침도 마련됐고 서울시에서는 뚝섬지역에 차이나타운을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할 정도가 됐다. 외견상으로는 문제가 없어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는 여전히 이들에게 냉소적이다. 한국인들이 이들에 대해 갖는 ‘이유없는 우월감’은 우리 스스로도 참 헤아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화교들은 “대출 때는 가장 비싼 금리를,이동전화개설 때는 추가보증금을 물리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지역 화교협회의 한 직원은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취직하더라도 승진은 꿈도 못꾼다”고 말했다.
▼핍박의 생활▼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화교 한성호(韓宬昊·73)씨는 50년째 한국에 살고 있다. 한씨는 ‘살아 있는 화교 역사’라고 불릴 정도로 그동안 ‘화교’라는 이유로 수난을 당해왔다.
◆"참정권 주면 뭐하냐"
한씨는 93년 아들 입표(入彪·45)씨를 한국에 귀화시켰다. 주위의 시선 때문만이 아니었다. 외국인은 임대업을 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대한 재산세와 각종 세금 등을 내려니 재정이 파탄직전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귀화도 쉽지 않았다. 4급 이상 공무원 신분을 가진 보증인 2명이 필요했기 때문. 한씨는 70년대와 90년대 초 두차례 신문 및 잡지사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국인에게 허용돼 있지 않아 한국인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해야 했고 이 한국인 때문에 재산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한씨는 손자들마저 학교에서 ‘중국X’이란 소리를 들을 땐 가슴 아프다고 한다. 한씨는 “참정권을 주면 뭐하냐”며 “그보다 한국인들이 우리를 이웃으로 대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차이나타운 설립 필요
▼화교의 숙원▼
한씨처럼 대부분 화교들의 가장 큰 바람은 ‘이웃’으로 대접받는 것. 서울 마포구에서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A씨는 “사람들이 우리를 ‘장궤’라고 빈정대는 것에 이골이 났다”며 “왜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가”고 반문했다.
건국대 사학과 양필승 교수는 “중국과 동남아경제가 급속도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화교의 경제력을 잘 활용하면 국내 경제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 한가지 방안으로 국내에 ‘21세기형 차이나타운’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우리의 배타적 외국인관(觀)을 일거에 극복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위상을 아시아의 한 구심으로 세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훈·이완배기자〉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