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북한문제 목소리 높여라

  • 입력 1999년 9월 14일 18시 38분


북한이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한 것이 94년10월이다. 5년 후인 지금 북한은 다시 미국과 베를린 합의를 했다. 핵문제가 발단이었던 5년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미사일문제가 협상의 핵심이 됐다. 따지고 보면 북한은 두 경우 모두 문제를 만들고 시비를 걸어 협상의 대가를 챙겼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북한이 그처럼 미국을 상대로 ‘흥정’을 벌여온 저력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속된 말로 북한의 ‘깡’과 ‘벼랑끝 외교’가 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벨를린서 논의안돼▼

앞으로 있을 북―미(北―美)협상과정에서도 북한이 그런 식으로 한반도문제를 ‘취급’하려 들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베를린합의는 환영하면서 남북대화는 오히려 더 요원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기왕에 미국과 대화의 길을 튼 북한이 무엇 때문에 남한당국을 상대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당장 이번 베를린합의에는 남북한 관계에 대한 얘기가 한마디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제네바회담 당시에는 남북대화 문제가 항상 협상테이블의 한 가운데 있었으며 합의문에도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선다는 명문 조항이 있다. 그러나 이번의 양측 언론발표문은 ‘동북아시아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거론하면서도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남북한 문제가 양측 합의에 장애가 된다고 의도적으로 피한 결과일까. 아니면 페리보고서에 대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남북한문제가 자연히 거론될 것이기 때문에 베를린 회담에서는 제외시킨 것인가.

김영삼(金泳三)정부는 북―미간 협상에 남북대화문제를 끈질기게 올리려 했다. 반면 현정부는 그런 방식의 노력을 의미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있다. 남한당국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북한측의 태도가 아직은 요지부동인데 구태여 대화를 ‘구걸’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현정부의 생각인 듯하다. 하기는 그런 ‘구걸’을 하다보면 북한측의 콧대만 세우고 이용만 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동안의 남북당국간 대화행태를 보면 북한측 태도에 회의를 가질 만도 하다.

더구나 현정부는 한미(韓美)간 공조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미국이 대북(對北)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역할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또 북―미관계의 진전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개혁 개방이 되면 평양당국이 자연히 남북대화의 장으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현정부가 김영삼정부와는 달리 우방의 대북관계 진전을 오히려 권장하는 이유도 그같은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측 주도권 확보를▼

그러나 현정부의 판단에는 큰 함정이 보인다. 북한이 대미(對美)관계개선을 통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남북한과 미국의 평화로운 3자공존은 아닐 것이다. 한미간 유대를 와해시켜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새로운 세력구도를 만들겠다는 북한의 의도는 오래전부터 명백히 드러났다. 따라서 북―미관계가 진전될수록 우리의 안보문제는 더욱 뜨거운 논란거리로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세계전략차원에서 한반도문제를 분석하고 있는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우리의 입장을 100% 다 반영할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우리의 입장이 미국 대표를 통해 대변된다고해도 그 전달 과정에서의 ‘변색’이나 ‘굴절’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한반도정세는 항상 유동적이다. 이해당사국들의 입장도 수시로 바뀐다. 자칫하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세가 흘러간다. 북―미 접촉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도, 우리가 남북한 당국대화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한반도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든 남북한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미협상에 남북기본합의서 실천 논의가 필수조건이 되도록 외교적 고리를 걸어 놓을 필요가 있다. 과거 정부의 남북대화 ‘집착주의’를 되풀이하라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공조만 잘하면 북한이 스스로 다가오게 되어 있다는 소극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목소리를 높일 때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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