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김갑수 '방죽 위에 서서'

  • 입력 1999년 9월 14일 18시 38분


그러나 사랑에는 순탄하든 험악하든 모두 제 갈길이 있는 것인데 이 사랑은 전혀 그런 길이 없는 것이에요

때로 방죽 위에 서서 저무는 하루를 굽어봅니다

날은 느릿느릿 멀어져가고

여울에 휩쓸린 물풀의 머리칼이 흔들립니다

바람에 내맡긴 이마를 흔들리는 머릿결이 덮어줍니다

새로 오는 하루는 언제나 처음인 양하지만

하루의 전모는 마침내 습관일 뿐이었습니다

바람불면 언제나 처음인 양

마음 가는 대로 기울고 흔들리던

분별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분별이 없어서 가문 들녘에 억새풀들만 웃자라는지

웃자라는 만남의 기억이 마른 살갗에

문신으로 따금뜨금 새겨집니다

이렇게 방죽 위에 오래 서서

떠나는 하루를 바라봅니다

아스라한 저 언덕 너머에 가여운 만남이 있었다고

저녁 하늘에는 병깊어어두운별들이

살아갈 날의 마침표로 총총 박힙니다

―시집‘세월의 거지’(문학과 지성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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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에도 경지가 있다. 그토록 달랠 길 없는 불행을 누그러뜨려주는 것은 체념이다. 마른 살갗에 문신이 새겨지는 듯한 고통이 따른 뒤이겠지만 올바른 체념은 절망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정신의 몸조리이기도 하다. 방죽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분별없는 사랑은 체념한 뒤에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험악하든 순탄하든 어떤 길이 보일지도.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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