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나 현실을 감안하면 다음 세기에도 여간해서 우리가 선진 강대국 대열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21세기에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유지되며 여기에 유럽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요 세력들이 견제와 균형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열강이 다투던 18, 19세기의 유럽과 비슷한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나온다. 그러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고 국가간 리더십을 확보하는 길은 또 달리 있을 것이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그 좋은 예를 제시해 준 것 같다.
APEC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선진국과 개도국을 모두 회원국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통일된 경제정책이나 입장을 채택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서로가 보완하기 힘든 입장차이 때문이다. 이번에도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체제의 확대를 주장한 반면 개도국들은 선진국들의 금융시장 개입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며 국제금융기준 마련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정책마련에 실패했고 마침내는 APEC 무용론까지 대두됐다.
그러나 사실상 선진국과 개도국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이번 APEC가 국제무대에서의 리더십과 외교력 발휘가 가능한 장(場)을 제공해 주었다. 김대통령은 자유무역체제 확립을 지지하면서 투기성 단기자본 이동에 대한 감시체제 확립도 요구하는 등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을 ‘교통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김대통령이 제의한 역내 불균형해소를 위한 협력프로그램도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포함됐고 선 후진국간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 포럼을 열자는 우리의 제안도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내년에는 김대통령이 이번 APEC에서 제의한 서울 포럼 외에 20여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도 서울에서 열린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그만큼 다음 세기의 외교적 지평을 확대할 기회와 길이 열려 있다. 아무리 우리가 선진 강대국 대열에는 들지 못한다 해도 ‘중간적 위치’의 이점과 기능을 충분히 활용만 한다면 선 후진국간 입장차이를 조정하고 이해관계를 잇는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