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26)

  • 입력 1999년 9월 20일 18시 43분


갈무리 했던 배추를 싱싱한 푸성귀가 나오는 삼월 초까지 먹어야만 하였다. 신문지에 배추를 싸서 언제나 어두운 계단 밑에 놓아 두면 겨우내 싱싱했다. 우리는 배추를 한 끼에 한 포기씩 먹었다. 먼저 겉잎들을 벗겨내고 속만 남겨서 관급 고추장에 참기름을 두어 비벼서 장을 만들고 쌈을 싸서 먹었다. 쌉싸름하고 고소한 풀냄새가 입맛을 돋우었다. 하루 이틀은 맛있게 먹어대지만 며칠이 지나면 배추를 보기만해도 풀냄새가 입 안에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겨우내 떨어진 체력을 키우려면 상자 안에 가득찬 배추를 먹어 치워야만 하였다. 이대로 우물쭈물 겨울을 넘기고나면 비타민 부족으로 잇몸이 들뜨고 나중에는 이가 몇 대씩 빠질 것이다. 출소하는 선배들은 겨울의 비타민 부족을 경험한 이들이었는데 일단 석방 되고나면 자고 일어나서 흔들리는 이빨을 혀 끝으로 지그시 누르다보면 한 두 대씩 빠진다고들 하였다. 배추의 노란 속잎에 밥을 놓고 장을 쳐서 크게 한움큼 싸서는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무슨 건더기라도 있으면 얼마나 맛이 좋아질까.

소지와 나는 궁리 끝에 마른 오징어를 요리하기로 했다. 구매부에서 파는 마른 오징어를 열 마리쯤 사두었다가 들통에 받아 놓은 더운 물에 밤새 담가두면 오징어가 제법 부드럽게 불었다. 이것을 잘게 썰어서 다시 물주전자에 넣고 끓이는데 담당이 이쯤은 모른체 해주니까 복도에 놓은 연탄 난로 위에다 삶는 것이다. 팔팔 끓을 때 주전자를 들어내어 보면 오징어 다리가 통통하고 말랑하게 데쳐져 있었다. 씹어 보면 꼭 물오징어를 데쳐 놓은 것과 똑같았다.

그리고 초장도 만들었다. 관급 고추장에다 요구르트를 넣고 잘 저어서 묽게 만들어 햇빛이 드는 옥창 가에 한나절만 내다두면 새큼하고 맵싸한 초고추장 맛이 되었다. 우리는 배추 쌈에 오징어회를 확보한 셈이었다.

그래도 누구인가와 다투어 가며 눈길도 맞추면서 젓가락이 엇갈리기도 하며 밥을 함께 먹을 상대가 있다는 것은 독방 수감자에게는 다행한 식사 시간이었다. 저녁 끼니만은 폐방하고나서 배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거수는 혼자서 밥을 먹어야만 했다. 나는 배식 시간이 오면 깨끗하게 간수해 두었던 하얀 플라스틱 밥 그릇, 국 그릇, 찬 식기, 그리고 목공부 수인들에게 부탁해서 만든 길고 매끈한 나무 젓가락과 숟가락을 신문지 위에 놓고 식구통 앞에 앉아 기다린다. 손수레가 다가오고 식구통이 열리고 김나는 밥과 국과 반찬이 들어온다. 더 이상 들어올 것은 없는데도 나는 진작 식구통을 닫지 못하고 잠시 더 기다려보다가 밥을 먹는다. 벽을 향하여 앉아 한 숟가락을 듬뿍 떠서 입 안에 처 넣고 아무 생각도 없이 우물우물 씹는다. 벽에 씌어진 요란한 낙서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무심할 뿐. 그래도 식사시간이라고 교무과 당직이 음악 방송을 틀어준다. 그냥 무성의하게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낡은 카세트를 꽂아 넣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내리 사흘 동안 똑같은 노래나 음악만 나온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다.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각 방에서 나직하게 웅성대는 소리와 음식을 먹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무슨 경건한 예배라도 보는 것 같은 숙연한 느낌이 아니던가.

언젠가는 눈이 내리는 날이었는데 미지근한 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 어쩐지 울컥, 하더니 눈물이 새어 나왔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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