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의 정신 잘 지켜야▼
재판업무는 독립을 생명으로 하는 까닭에 개개 재판부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로지 법과 정의에 의해서만 판결을 한다. 따라서 대법원장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재판이 워낙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업무이고 보면 그 업무가 정당하게 행해지도록 하는 임무의 총책임자인 대법원장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하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1년 6개월전에 22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변호사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내게 사건을 의뢰한 아주머니 한 분이 다른 사건을 혼자 진행하러 법정에 갔다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왜 나오느냐”고 재판장이 고함을 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심장이 나쁜 사람이 혼났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그 아주머니가 법원에 재판이라는 서비스를 의뢰한 사람이고 법관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된다.
당사자나 증인에게 반말을 하는 행태도 있다. 필자는 젊은 판사시절 즉결법정에서 피고인 이름만을 부르는 식으로 재판을 진행하다가 “권 아무개”하고 이름을 부르고 보니 아뿔싸 그분은 어머니의 4촌오빠이신 아저씨이지 않은가. 어찌 당황스럽고 부끄러운지 그 뒤부터는 반드시 “아무개 씨”라고 경칭을 붙였다. 죄를 지었다고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확정판결을 받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은 법정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법원은 가진 자를 우대해서도, 없는 자를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한갓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들이 모든 사건을 당사자 못지 않은 진지함과 애정을 가지고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심리종결을 회피하는 재판진행, 사건을 떼는 데만 목적을 두는 듯한 재판은 있어서는 안된다.
▼국민기대 충족시키길▼
변호사의 수임비리가 엉뚱하게도 재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작년여름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길목에는 연일 법관을 욕하는 글이 쓰여진 나무판을 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도둑놈 강도 판검사’라는 글을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법원이 너무 바보스럽고 미웠다. 변호사인 내가 그랬을 진대 현직판사들은 오죽했을꼬.
예전에 법원이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과연 법원이나 법관이 자신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이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관(官) 존중사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자만감인지 자부심인지 모를 자신감과 일반인들의 선망이 상당부분 권위라는 거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는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 그것으로 권위의 탑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야 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새 대법원장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데 이제는 공정한 인사질서가 확립되고 구태는 사라질 것으로 믿어본다. 최대법원장은 오후 9시경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 가봐야 한다. 불빛이 환하게 새어나오는 방에는 법관과 직원들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데, 대법원장이 수고한다며 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면 그들의 피로는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는지….
정치권력이 법원을 침략하던 독재정부 아래서 대법원장은 그 방패 노릇을 하도록 기대됐고, 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법원이 가장 무서워할 대상은 권력이 아닌 국민이다. 독재권력을 상대로 방어하는 일보다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쪽이 훨씬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짐을 지고 가는 최대법원장에게 테니스로 다져진 건강이 늘 살아 있기를 기원해 본다.
서태영<변호사>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