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시오.
그는 내가 먼저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늉을 했다. 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사무기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책상이 두 개 더 늘어나고 응접 세트는 치워 버렸다. 아마도 김의 자리는 맨 안쪽 창문을 등진 자리일 테고. 왼쪽 벽가에 붙여 놓은 책상 앞에는 다른 사람이 엎드려서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김 선배가 자기 자리로 들어가서 앉기 전에 옆에 놓인 접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으세요.
우리는 문을 향하고 나란히 앉은 셈이다. 나는 낯선 사람을 건너다 보고 나서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변했네요….
예? 아아 그렇게 됐습니다. 얼결에 덤터기 써 버렸어요.
하더니 김은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정형 인사하지. 이쪽은 영태 친구되는 분인데.
그는 말없이 목례를 해보였다. 김 선배가 터 놓고 말을 시작했다.
송가 녀석이 자취를 감춰 버리는 바람에 여길 떠맡게 되었어요. 그냥 집세만 날릴 수도 없구 해서 우리들 밥벌이터로 만들었지. 번갈아 일거릴 가지구 나와서 푼돈을 벌구 있어요.
송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 모르고 계시던가? 그 친구 수배 중이오. 미 문화원 농성 이후로 뒤에서 뛰던 친구들까지 몽땅 사라졌소.
아무렴 연락할 길은 없겠지 열나게 찾아 볼 생각도 없으니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경조사에도 돈 봉투로 쓰는 우체국 표준 사이즈의 그것이 아니라 주제넘게 붉고 푸른 줄이 쳐진 넓적한 항공 봉투였다.
튀기 바로 전날 여기서 보았어요. 지금쯤 꽁꽁 숨었을걸. 그 광주 팜플렛이 전국의 대학과 노동 현장으로 퍼져 나갔거든. 책도 지하에서 나와 버렸구요. 지난 겨울부터 차례로 진행된 프로그램이었으니까.
나는 송영태의 편지인 듯싶은 봉투를 백에 넣고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였는데 김 선배가 말했다.
너무 걱정은 말아요. 송가는 그래 봬도 원래 도련님이니까 어디 경치 좋은 데서 독서나 하구 있을 거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막 왕성하게 짙어가고 있는 가로수의 신록이며 한낮이라 인적이 많지 않은 거리도 걷기에 괜찮았다.
<글:황석영>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