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 소니명예회장이 3일 78세로 타계하자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를 비롯한 일본 각계는 그에 대한 추모와 칭송의 열기에 휩싸였다. 패전국 일본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킨 손꼽히는 ‘기업영웅’인만큼 그럴만도 하다. 지금 일본은 제2, 제3의 모리타 등장을 대망(待望)하기 때문에 그를 ‘세기의 거인’ ‘일본 성장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기에 더욱 여념이 없는지 모른다.
▽물리학도였던 모리타의 기업가 일생은 일본 패전 이듬해인 25세때 13세 연장인 기술광(狂)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함께 직원 20명의 ‘동네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모리타는 ‘세계최초, 적어도 일본 최초’라는 도전정신으로 테이프레코더 트랜지스터라디오 스테레오헤드폰 CD 워크맨 VTR 등의 신제품을 내놓으며‘지구촌의소니’를실현했다. 그는새로운개념의신제품, 학력보다는능력우선,종업원 제일주의,일본보다는세계시장 선점등을실천한기업지도자였다.
▽한편 모리타는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은 필리핀에 게으름만 가르쳤다”는 등의 말로 일본 과거사를 미화하는 데도 앞장섰다. 히노마루(日の丸·일본국기)를 등에 진 서구형 경영자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역사관은 문제가 있지만 기업가로서의 모리타와 같은 인물은 우리나라에도 소망스럽다.
〈배인준 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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