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음악회는 그 다음에 시작되었다. 이국의 교향악단도 이 땅에서는 애국가부터 연주를 해야했다. 70, 8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서러운 이별의 사연이 담긴 음반도 끝에는 씩씩하고 우렁찬 ‘건전가요’를 끼워 넣어야 했다. 영화관에서는 대한뉴스부터 보아야 했다. 수출공단을 시찰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감격스럽게 비춰졌다.
문화는 그렇게 엄숙한 것이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은 건물로 표현된 그 엄숙한 시대의 단면이다. 세종로 한복판에 문화센터를 짓는다는 것은 건축가에게는 일생동안 간직할 영광의 기회였다. 선택된 건축가는 탁월한 조형능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전통 양식과 고대 그리스의 양식이 적당히 버무려진 그런 건물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모양은 그만큼 시대가 지닌 문화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문화의 엄숙함만큼이나 배타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길게 뻗은 계단, 배흘림 기둥이 만드는 열주(列柱), 사람을 압도하는 크기, 좌우대칭이라는 권위주의적 건축형태는 여기서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남산의 국립극장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위대한 신전은 대중문화를 담지 않았다. 연습이 덜 된 목소리라도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성악가는 이 무대에서 노래했다. 그러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며 듣던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아무리 실력이 걸출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 무대는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축사를 하는 거룩한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서양의 대중문화는 황공히 받아들였다. 폴 모리아악단도 앤디 윌리엄스도 문제없이 이 무대에 섰다.
이런 권위주의적 문화관을 거부하는 건축가가 등장했다. 새 건물은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 마련되었다. 건축가가 바라보던 문화는 그렇게 무거운 인상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문예회관에서 열주는 사라졌다. 건물을 이루는 덩어리들도 잘게 나뉘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재료인 벽돌이 건물을 감쌌다. 건물의 입구에는 공원 쪽으로 손처럼 길게 캐노피(canopy)가 나와있다. 어서 이 손을 잡고 극장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건축가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회관도 세종문화회관이 지닌 탄생의 업보는 해결할 수 없었다. 음악회, 강연회, 연극을 모두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무엇 하나 제대로 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고 말았다.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올림픽은 그냥 운동회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개최지에서는 기념음악회도 한다고, 우리도 제대로 된 음악당 하나는 가져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역시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평생 한번 접하기 어려운 영광의 기회였다. 현상설계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건축가에게는 영광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높은 의자에 앉은 공무원이 수정을 요구했다. 권력의 힘이 건물의 모양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건축가가 버텨낼 길은 없었다. 설계안은 변경되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콘서트홀은 합죽선, 오페라하우스는 갓모양이 된 것이다. 예술의 전당은 또 그렇게 한 시대의 문화를 담아내게 되었다.
예술의 전당의 공연장은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용공간답게 음향은 탁월하다. 그러나 이 건물이 지닌 진정한 승리는 로비의 개방에 있다. 항상 닫혀서 어둠과 침묵만 보여주던 이전의 건물들과 달리 콘서트홀, 오페라하우스의 로비는 항상 열려있다. 건물은 그만큼 권위와 배타성을 벗어 던졌다. 우리 문화는 그렇게 조금씩 갈 길을 제대로 찾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도 뒤늦게 대중가요 가수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비는 아직 닫혀있다. 예술의 전당에 쏟아지는 가장 큰 비난은 그 위치다. 옛 경희궁터인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세워질 예정이던 예술의 전당은 결국 서초동 우면산 기슭을 찾아들었다. 퇴근하지 않는 상사의 눈치를 보다 퇴근한 사람이 지하철역에서 그 먼 거리를 걸어 7시반 공연시간에 맞춰 콘서트홀에 들어서기는 쉽지 않다. 문화는 밥과 반찬처럼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두번 작심하고 다가가야 할 순례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인 우리 문화의 모습이다.
그래서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유행처럼 문화회관을 신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쌓인 교훈은 무시되었다. 세종문화회관처럼 권위적인 모습에, 문예회관처럼 좋지 않은 음향을 가진 건물들이, 예술의 전당처럼 산 속에 계속 지어지고 있다. 정말 그렇다. 새로운 건물들은 또 그렇게 설익은 우리의 문화를 보여준다. 음악은 시작되었어도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 아무리 연주회 전에 당부를 해도 기어이 ‘삐리리리’ 소리를 울리고야 마는 모습, 연주자의 팬사인회가 있다고 하면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 줄서러 나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문화는 꼭 그 정도의 건물을 요구하고 얻어낼 따름이다. 그래서 건축은 그시대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 '평등의 정신' 녹아든 객석
공연장이라는 서양의 건물 양식이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것은 르네상스 시기였다.
이 때는 연극이 주된 공연대상이었다. 그러기에 무대에서는 배경그림이 필요했고 새로 발견된 투시도법은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무대배경은 객석의 한 복판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았을 때 가장 좋은 효과를 얻도록 제작되었다. 그 자리는 왕족과 귀족의 자리였다.
차별화된 좌석배치에 관한 불만은 시민사회가 무르익으면서 독일을 중심으로 불거져 나왔다. 바그너의 악극 연주를 위해 건설된 바이로이트 가극장에서는 공연장을 둘러싸고 있던 갤러리박스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초인과 인간의 갈등을 다루는 바그너의 악극 앞에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무엄한 것이었다.
진정 혁명적인 계획은 현대에 들어서 제시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음악당을 설계한 건축가는 객석을 모두 흩어놓았다. 고전적인 객석의 위계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건축가가 바라본 세계에서는 더 중요한 자리도 덜 중요한 시민도 없는 것이었다. 무대는 객석의 한가운데 배치되었다. 음악은 이제 음악당의 한가운데서 불길처럼 번져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건축가가 사회에 던진 도발적 질문이고 답이었다.
온갖 공연을 다 수용해야 하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어떤 도발적 질문이 들어있는지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합창석을 뒤에 배치해 객석에 한발 다가선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우리가 겨우 마련한 첫 전용공간이다. 시작부터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질문은 이제 던져질것이다.
▼ 필자약력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콜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졸업
△현건축 소장
△저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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