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출생과 성장]고급잡화 대명사 에르메스

  • 입력 1999년 10월 12일 18시 42분


183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는 티에리 에르메스라는 갖바치가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만든 마구 용품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서열’이 처지는 귀족들은 말 안장 하나 구하는데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에르메스가 마구 용품을 하나 만드는데도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였기 때문.

에르메스는 우선 최상의 가죽이 아니면 소재로 택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가죽을 구한 뒤에도 참나무 껍질과 함께 구덩이에 넣고 8개월 이상 무두질을 한 뒤 갈라지지 않는 가죽만을 따로 분류했다. 에르메스는 여기에다 밀랍에서 추출한 실만을 이용한 겹박음질로 견고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남다른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같은 노력 덕택에 에르메스의 마구 용품은 19세기가 끝날 무렵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 뿐 아니라 러시아의 황제와 일본의 군주들에게까지 납품됐다.

에르메스가 마구용품에서 탈피해 오늘날 가방 벨트 액세서리 향수 등 대부분 잡화로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에르메스의 손자인 에밀 모리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에밀 모리스는 말을 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또 필요한 지를 궁리하다가 승마 부츠와 승마 도구를 넣는 가방을 고안해냈다.

마구용품 제작으로 다져온 바느질 솜씨는 가방 제조에서도 발휘됐고 상류층은 또다시 에르메스의 가방제품에 찬사를 보냈다.

에르메스가 오늘날 고급 잡화제품의 대명사가 된 것은 시대를 초월해 변치 않은 장인(匠人) 정신 때문. 에르메스의 가죽 구매전문가는 지금도 전 세계를 돌며 에르메스의 기준에 맞는 가죽만을 고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프랑스 파리근교 팡탱에 지어진 에르메스의 공장에는 500여명의 장인들이 아직도 손으로 모든 제품을 만들고 있다.

초창기 유럽 상류층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전통도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도 내로라하는 세계 각국의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56년에는 그레이스 켈리가 에르메스의 핸드백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이 핸드백에 아예 ‘켈리 백’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였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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