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사회 체험후 실망
그 때 프랑스의 지성계는 소련이 인류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련의 혹독한 억압체제를 감쌌으며, 거기엔 사르트르와 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으로 널리알려진앙드레 지드는 1936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소련기행’을 출판하면서 환상이 깨어졌음을 고백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새 세계를 찬양하기 위해 확신에 찬 열광적인 추종자로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내 마음을 끌어 환심을 사기 위해 낡은 세계에서 내가 혐오를 느꼈던 모든 특권과 특전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실망했다.”
아서 케스틀러의 경우도 지드와 비슷했다. 헝가리 출신의 공산주의 언론인인 그는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권 확립을 위해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무자비하게 불법적으로 처형하는 데 충격을 받아 전향했다. 소비에트 체제의 비인도성을 폭로한 ‘대낮의 암흑’은 문학적 가치에서 ‘소련기행’을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탈리아의 공산당원이었던 이나시오 시로네, 미국의 공산당원이었던 리처드 라이트, 소련을 좋아했고 옹호했던 미국의 신문기자 루이스 피셔, 영국의 공산당원이던 스티븐 스펜더 등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들은 모두 소련의 실상을 자주 접하면서, 또는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을 겪으면서, 그들의 표현으로는,‘악의 미몽’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로부터의 전향자들 가운데 대표적 지식인은 이동화(李東華)였다. 일제 치하의 도쿄제대 정치학과 학생 때부터 마르크시즘에 빠져 항일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가 해방 직후 월북해 김일성(金日成)대학의 교수로, 정부 기관지인 ‘민주조선’의 주필로 활약했던 그는 공산통치를 5년 정도 겪으면서 완전히 실망한 것이다. 서방의 지식인으로는 호주국립대의 개이번 매코맥 교수가 대표적이다. 수십년에 걸쳐 북한을 찬양했던 그는 92년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북한 체제를 ‘신(新)전체주의’로 자리매김하면서 철저히 비판해 북한에 호의적이던 좌파 지식인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토론돼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어째서 이 뛰어난 지식인들이 공산체제에 환상을 가졌던가 하는 점이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사회병폐 근절해야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실망과 분노이다. 따라서 ‘만인평등’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에 반사적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졌던 것이다. 둘째, 공산체제가 초기엔 강압과 폭력에 ‘불가피하게’ 의존한다고 해도 종국엔 자유를 허용하는 쪽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공산체제에서도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계급이 형성됐다는 사실, 그리고 공산체제에서의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부분적인 화장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서 전향했던 것이다.
최근 서울대 재학 때이던 80년대에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남조선 혁명’을 꿈꾸며 북한을 방문한 뒤 돌아왔던 두 지식인이 전향서를 발표했다. 앞에서 거론한 지식인들의 경우와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가. 그들이 수사당국에 포착되기에 앞서 전향을 발표했더라면 더 좋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여기서 우리가 새삼스레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 사회의 병폐가 도를 지나쳐,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의 인도주의적 정열과 ‘나를 희생하고서라도, 가난에 시달리고 억눌려 사는 대중을 구원하는 데 몸을 바치겠다’는 구세사상을 자극하게 되는 경우 아무리 현실적으로 부정된 마르크시즘이라고 해도 거기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개혁을 꾸준히 깊이있게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를 건강한 민주복지국가로 가꿔야 젊은이들의 사상적 방황을, 그리고 비록 크게 약화됐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친북 성향을 치유하게 될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 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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