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취재팀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독자적으로 대책기구를 결성, 피해조사에 나서거나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정부도 노근리사건이 부각된 이후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양민학살 문제를 더이상 방관할 수 없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학살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곳들 중에는 ‘고의적 학살’이라기보다 ‘단순 오폭’ 등에 의한 피해로 지목되는 곳도 있어 일차적으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주민 83명이 전쟁초기인 50년 미군의 총격에 의해 집단희생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성주 이씨 집성촌인 곡안리에서는 그해 8월11일 오전 100여명의 주민이 인민군과 미군의 교전을 피해 마을에서 300m 떨어진 성주 이씨 재실(齋室)로 대피했다가 마침 이 마을에 주둔중이던 미25사단 포병부대의 총격을 받았다는 것.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오전 마을 뒷산에서 내려온 수명의 북한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미군 3명이 사망했다. 미군측은 재실의 피란민 무리 속에 북한군이 숨은 것으로 판단했는지 30여분 뒤 소총과 박격포 등으로 집중사격을 했다. 전투기까지 동원돼 오후 늦게까지 계속된 공격으로 주민 8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살아남은 사람은 10여명뿐.
당시 전각 옆 변소에 숨어 희생을 면한 조호선(趙好善·83·여)씨는 “미군이 ‘날이 밝으면 피란하라’고 통보해 급한대로 재실에 숨어 있었다”면서 “미군은 아마도 인민군과 주민이 내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총격을 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
50년 8월초 마을 근처에 주둔해 있던 미군의 총격으로 마을주민과 인근의 피란민 100여명이 희생됐다는 주장도 관심을 끈다.
당시 창녕지역에 주둔중이던 미군 24사단은 낙동강변 전투에서 북한군에 밀리면서 진창리와 광산리 등 인근지역 주민들을 강변에서 20여리 떨어진 창녕읍 지역으로 피란시켰다. 읍내의 초막골은 당시 30여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몰려든 수백명의 피란민들로 크게 붐볐다.
주민 황남연(黃南淵·68)씨는 “음력 7월12일 오후 인민군 6명이 뒷산에서 마을로 내려와 미군을 향해 3발의 총격을 가한 뒤 사라지자 이에 놀란 미군이 마을을 향해 수시간 동안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며 “이때 불바다가 된 마을을 허겁지겁 빠져나가 미군부대로 대피하려던 피란민들이 계속 총격을 가해온 미군들에게 희생됐다”고 증언했다.
당시 부친과 아내를 잃은 배진섭(裵震燮·71)씨는 “미군이 주민들을 직접 초막골에 대피시켰기 때문에 우리가 인민군과 아무 관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무차별로 총을 쏜 것은 학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51년초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마을 동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과 피란민 300여명이 사망했다.
당시 마을 인근의 곡계굴에는 강원 영월 평창 등에서 내려온 피란민 200여명과 마을 주민 100여명이 추위와 폭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51년 1월20일 비행정찰 도중 동굴 앞에 주민들이 쌓아놓은 가재도구 등을 보고 북한군이 숨은 것으로 오인, 동굴 입구를 집중 폭격해 안에 있던 주민들이 질식사하는 등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
이날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잃은 조준형(趙俊衡·61)씨는 “당시 동굴 앞에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았으며 흰옷가지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외쳤는데도 미군기가 무차별로 폭격했다”며 “한달 뒤 미군2명이 헬기편으로 폭격현장을 방문, 동굴안에 방치돼 있던 시신들의 사진을 찍어갔다”고 증언했다.
▼기타지역
미군정기인 48년 6월8일 독도로 미역채취 나간 울릉도 주민들은 서도 앞에 배를 세워놓고 작업을 하다가 울릉도 방향에서 나타난 10여대의 미군기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았다. 이날 80여척의 배가 파손되고 배에 타고 있던 어민 150여명도 대부분 희생됐다. 사건 직후 미군당국은 피해조사를 벌이고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으나 피해자들은 배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또 경남 의령 사천 함안, 경북 구미 예천, 전북 익산 등에서도 미군기의 무차별 총격 또는 폭격으로 수십∼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학살이나 오폭이냐
마산과 창녕의 2곳을 제외하면 모두 미군기의 폭격에 의한 것이어서 학살의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게다가 전쟁초기에 양민과 북한군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폭격한 것이다보니 그 과정의 피해를 ‘양민학살’로 규정할 수 있는지도 논란거리. 또 미군의 직접 총격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북한군과의 야간교전 과정에서 적군과 주민을 구별하기 힘든 상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피해주민들은 “당시 인민군과 주민의 생김새와 복장이 비슷해 구별이 힘들었다고 미군측이 주장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에게까지 폭격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오폭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배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국제법의 확립된 견해라고 말한다.
연세대 법학연구소 장복희(張福姬)전문연구원은 “비록 오랜 시일이 지난 사안이라도 반인도적 집단살해의 경우 인도적 차원에서 가해국이 사과와 배상을 한 사례가 많다”며 “일차적으로는 미국정부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지만 우선 자국민에 대해 외교적 보호권이 있는 정부도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서 사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