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한 실상 드러내▼
북한연구가 직업이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은 이런 노동신문을 몇 번 보고 나면 질릴 수밖에 없다. 북한 위성 TV 시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통령의 동정이 뉴스 첫머리에 나오는 것에도 거부감을 갖는 것이 우리 국민의 정서다. 하물며 김정일 찬양을 위해 극상(極上)의 미사여구를 쏟아내는 북한 TV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무엇을 느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북한이 체제 선전으로 보여주는 것들은 대개 개인 숭배물이거나 동원된 사회 모습, 그리고 남한 기준에서는 낡거나 볼품없는 공장과 건축물이다. 그것들은 거꾸로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정치문화와 낙후한 사회실상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에 이념적 색채가 엷은 영화나 오락물들은 군사주의의 깃발 밑에 감추어진 그들의 또 다른 삶의 단면을 보여주어 북한 이해를 증진시킬 것이다.
물론 체제와 사상이 다르고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상대방 TV의 시청을 허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수십배 많고 상당한 수준의 민주발전을 이룬 우리가,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외부원조 없이는 생존조차 불가능한 독재체제가 송출하는 전파매체에 움츠러든다면 어떻게 냉전을 해체하고 북한을 평화로 끌어낼 수 있을까? 이제 신중하되 자신감을 가질 때다.
북한방송이 대남 비방 중상을 해도 거기에 현혹될 정도로 국민의 의식수준이 낮지도 않다. 우리 국민은 북한의 대남 비방에 대해 그 ‘레퍼토리’를 꿰고 있을 정도로 정통하다. TV를 막아도 단파라디오 국내언론 등을 통해 그런 얘기는 얼마든지 우리 사회를 감염시킬 수 있다. 단지 그런 정도에 귀 기울이지 않을 만큼 시민의식이 성숙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소(一笑)에 부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번 북한 위성 TV 시청 허용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규제중심에서 벗어나 남북통합의 관점에서 미래지향적으로 문제를 풀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부도 밝혔듯이 북한 위성 TV를 단순 시청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 속에서 법과 관계없이 규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암묵적으로 금단의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번 조치는 적지않은 의미가 있다.
▼문화교류-화해의 첫발▼
남북관계에서 볼 때 이번 조치는 남북 문화교류를 위해 우리가 먼저 화해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상대가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여유있는 우리가 먼저 열린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방송만큼 남북간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데 훌륭한 역할을 하는 매체는 없다. 물론 북한지도부가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체제위협의 핵심요소로 보고 있기 때문에 당장 남북간 방송교류가 촉진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번 조치는 방송교류로 나아가는 소중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북한 방송 개방의 첫 걸음에 불과하다. 그것마저도 국가보안법 개정이 없는 한 북한 위성 TV를 보는 시청자는 위험천만하게도 ‘보안법 위반’이라는 지뢰밭에 방치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보다 열린 정책이 후속으로 나와야 한다.
이번 조치를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북한 위성TV의 활용 기관이 통일부와 언론사로 제한됐다는 점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정책의 당면목표는 북한과 평화공존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북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며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몇몇 특수기관만 가지고 이 필요성을 달성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부는 당연히 연구기관과 대북사업체까지 폭넓게 그 활용을 허용해 생생한 북한정보를 북한연구와 대북사업에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어야 했다. 차후라도 이러한 조치가 빠른 시일 내에 취해지기를 기대한다.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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