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이 정도의 책을 가지고…

  • 입력 1999년 10월 25일 18시 49분


탤런트 서갑숙씨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이하 ‘나도…’로 줄임)가 파문을 일으켰다. ‘풋사랑의 설레임’에서부터 ‘처녀 버리기’ ‘상처받은 사랑’ ‘결혼과 이혼’ ‘애정 없는 섹스’를 거쳐 ‘사랑의 공유’와 ‘멀티오르가즘 얻는 법’에 이르기까지, 주로 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글쓴이의 개인사를 엮어놓은 이 책은 출간 한 주만에 수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제목과 내용이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과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탓일 것이다.

‘나도…’ 파문은 ‘즐거운 사라’와 ‘천국의 신화’가 당한 수난을 떠올리게 한다. 교보문고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전량 반품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지만, 교보 측이 이 책을 ‘유해서적’ 취급을 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지난 금요일 텔레비전 드라마 ‘학교2’의 프로듀서는 일방적으로 서씨의 출연정지를 통보했다고 한다. 검찰은 화답이라도 하듯 ‘나도…’가 음란물인지 여부에 대한 내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표준형 시나리오에 따른 사태 전개다.

우선 교보문고에 한 마디. 유해성의 기준이 무언지도 궁금하지만, 지금까지 교보문고가 팔았고 지금도 팔고 있는 그 수많은 책들 가운데 ‘나도…’보다 더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은 없는가? 예컨대 음란성을 잣대로 삼을 경우 ‘나도…’는 소설 ‘실락원’이나 ‘게르마늄의 밤’ 따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무협지나 추리소설과 달리 ‘나도…’는 가족과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이다. 교보문고가 혹시 거래조건 때문이라면 모르지만 청소년 교육을 이유로 이 책을 차별대우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드라마 출연정지도 그렇다. 서갑숙씨는 실제 교사가 아니라 교사 연기를 했다. 성적 체험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교사 배역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느낀다면 스스로 그만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극중에서 선생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도덕 모범생이 아니라고 해서 배역을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출연자들에게 모범적 사생활을 요구하는 조항이 계약서에 들어있지 않다면 말이다.

검찰의 선택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와 ‘천국의 신화’가 당했던 수난을 돌이켜볼 때 ‘나도…’를 음란 출판물로 기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바로 이 순간 검찰청 어느 방에선가, 국민의 가치관을 바로 세우고 미풍양속을 수호하겠다는 고매한 사명감에 사로잡힌 야심만만한 검사가,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서씨의 책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씨가 ‘나도…’를 쓴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가슴 벅찬 사랑의 진리를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러한 표현 행위를 공권력이 억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에 어긋난다.

진정으로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청소년들에게 실제로 읽어보게 한 다음 이것이 유해한 음란 출판물인지 반응을 들어 보라. 안마시술소와 단란주점, ‘과부촌’과 ‘미인촌’의 간판이 불야성을 이루는 나라를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이 정도의 책을 가지고 난리를 치는 것을 보고 청소년들이 무어라 할 것 같은가.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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