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뇌물, 옛날이나 지금이나

  • 입력 1999년 10월 27일 19시 14분


도지사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감사(監司)의 주된 역할은 관내 수령(군수)들의 잘잘못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전최(殿最)라고 해서 오늘날로 치면 수령들의 고과성적을 매겨 임금에게 보고했다. 잘하면 ‘최(最)’, 못하면 ‘선(善)’을 주었다. 감사가 떴다 하면 융숭한 대접은 물론 뇌물도 늘 따라다녔다. 감사자리 중에서도 기생이 많은 평양이 특히 좋아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안한다’는 속담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그 시절 세종 다음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성종이 감사에서 승정원 승지로 영전해온 사람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감사들이 대접 정도에 따라 성적을 매긴다는데 사실인고?” “그렇사옵니다. 마마.” “어찌해서 그런고? 통탄할 일이로다.” “음식을 입에 맞게 바치는 것은 쉽사옵니다. 그런 쉬운 일도 못하는 수령이라면 다른 일은 보나마나 아니겠사옵니까?” 성종은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는 얘기다.

▽민간에 돌아다니는 얘기를 모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관리들도 부패가 심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사신들이 명나라에 갔다 올 때면 꼭 명나라 탐관오리들에게 돈을 뜯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산해관(山海關)이란 국경 검문소에서는 명나라에서 산 귀국선물마저 바쳤는가 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흐른 지금, 한국과 중국이 주요 19개 수출국 가운데 뇌물공여 지수 18, 19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다. 부패의 생명력이 정말 끈질기다.

▽99개국을 대상으로 한 부패지수로는 한국이 50위를 마크했다. 96년 이후 매년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참담하다. 조선왕조 500년간 청백리 반열에 오른 인물은 157명으로 평균 3년에 한명꼴이었다. 그런데 청백리의 대다수가 초기 현군(賢君)들 밑에서 나왔다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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