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과 예술]'신화'에 가려진 경쟁자들

  • 입력 1999년 11월 3일 20시 03분


우리는 비디오예술을 온통 백남준의 독점 예술품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즉 백남준을 비디오예술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하여 그 곳에서 영원히 황제로 군림하는 영웅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비디오예술계에는 여러 분야에서 나름대로 원조를 주장하는 의견들이 만만치 않다.

백남준신화를 거부하며 서양예술계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서양의 작가나 이론가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비디오예술에서 백남준 중심의 남성지배구조에 반발하는 페미니스트 그룹들도 자기목소리를 돋우고 있다.

▼보스텔-브레히트 초창기 활약▼

비디오예술의 원조를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볼프 보스텔이나 조지 브레히트에 대하여 아는 독자는 많지 않다. 독자들이 이들의 이름을 접한 것은 플럭서스 예술가를 소개하면서 잠시 눈여겨본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들의 이름이 비디오예술사에서 간혹 백남준보다 먼저 거론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비디오예술의 창시자 반열에 오르내리는 초기시대의 비디오집단이나 다양한 비디오기계를 발명한 예술가들은 백남준 신화의 그늘에 가린 역사적 인물들이다.

비디오예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백남준을 시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초기시대의 다양한 현상들을 오로지 백남준의 창업으로만 기록하는 것은 일방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비디오예술의 창업을 말할 때는 백남준만이 아니라 그의 경쟁자로서의 ‘창업자들’이라는 복수개념은 언제나 유효하다. 실제로 오늘날 비디오예술에 대한 역사정리의 시각은 백남준을 유일한 창시자로 보기보다는 그가 결정적인 위치에 있음을 기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비디오예술의 시조를 논할 때마다 백남준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일의 볼프 보스텔(98년6월 작고)과 미국의 조지 브레히트가 있다. 이들은 모두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의 창립멤버들이며 플럭서스 운동에 함께 참여하였던 동지들이다. 이는 곧 플럭서스가 비디오의 탄생과정에 결정적인 열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백남준보다 과격성 더해▼

볼프 보스텔은 백남준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그는 백남준과 동갑내기이다. 또 백남준이 1963년 파르나스 화랑에서 최초의 비디오전시를 가진지 두 달 뒤에 보스텔은 뉴욕의 스몰린 화랑에서 비디오예술의 또다른 기원을 제공한 ‘TV 데콜라지’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로 인하여 비디오예술의 시조가 백남준이냐 또는 보스텔이냐의 논쟁까지 제공하게 되면서 보스텔은 백남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백남준은 대중의 우상인 TV를 무시, 또는 억압하고 대중의 손으로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는 반 텔레비전 지배구조를 전방에 부각시켰는데 보스텔의 전시도 이러한 철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유사한 개념을 도입하였다. 게다가 그는 한 수 더 떠서 TV를 켠 채 영원히 묻어버린 TV장례식 해프닝을 연출하여 과격성에서는 오히려 백남준보다도 악명이 높다.

조지 브레히트도 비디오예술의 초기역사에서 늘 거론되는 인물이며 간혹 비디오의 시조 대열에까지 끼어든다. 그는 백남준의 첫 전시보다 4년 빠른 1959년에 TV모니터를 사용하여 카드놀이를 하는 플럭서스 양식의 해프닝을 기획해놓고도 텔레비전을 살 돈을 구하지 못했다. 하기야 플럭서스 정신에 따른다면 아름다운 생각만으로도 이미 예술은 성립 된 것이며 그것이 실천이 되고 안 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닌가.

백남준은 그의 첫 전시회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안내문에서 본인 이외에 당시 텔레비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던 보스텔과 스웨덴 출신의 쿠누트 비겐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들의 연구를 치하한 적이 있다. 이는 백남준과 동시에 보스텔이 텔레비전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백남준을 통하여 입증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전시가 백남준의 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나타남으로써 루에 모방에 관한 의문이 강하게 일게 되었다.

▼다양한 장르개념 등장▼

‘백남준론’으로 1985년 함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에디트 데커(현재 독일 본 현대미술관 프로젝트매니저)는 백남준이 비디오예술의 실질적 시조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입증했다. 그러면서도 이 논문은 지나치게 백남준 편에서 바라보았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공격도 받았다. 이 논문은 백남준이 비디오예술의 실질적인 시조라는 사실을 밝힌 동시에 보스텔의 작업이 백남준의 모방에 가깝다는 내용, 그리고 백남준 이전에는 누구도 구체적으로 텔레비전을 예술의 적극적 매체로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비디오카메라가 시판된 이후 비디오예술계는 그것을 사용한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장르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백남준은 비디오 테이프와 신디사이저, 비디오조각을 중심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비디오퍼포먼스나 게릴라비디오, 비디오공동체, 페미니스트비디오 등은 다른 작가들에 의하여 확산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다른 장르의 초기시대 작가들도 엄밀히 보아 자신의 분야에서는 비디오예술의 시조로 기록된다.

▼60년대말 게릴라예술 탄생▼

가령 60년대 후반 미국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비디오카메라에 담아 사건을 증언하고 사회변혁의 도구로 사용하려던 젊은 비디오작가들은 게릴라 비디오예술을 탄생시켰다. 민중 비디오예술의 시조들인 것이다. 또 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페미니즘 비디오예술의 선구자도 되었다.

특히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비디오가 나오면서 그들의 퍼포먼스를 기록할 유일한 수단을 갖게 됨에 따라 초기 비디오예술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만약 비디오가 없었다면 퍼포먼스 작가들은 그들의 예술을 담을 도구를 갖지 못한 채 무대 위에서 일회성 공연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퍼포먼스비디오예술에서는 선구자들이다.

글·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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