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이젠 정치 그만 두시지요"

  • 입력 1999년 11월 5일 19시 18분


본인으로서는 매우 섭섭하고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회의 이종찬부총재는 아무래도 이쯤에서 정치를 그만두는 게 좋을 듯싶다.

이부총재는 국가정보원장을 그만두면서 상당량의 문건을 임의로 갖고 나온 것이 문제가 돼 여권에서는 한때 당직사퇴는 물론 사법처리 가능성까지 거론됐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하루만에 별 거 아닌 것으로 진화돼버렸다.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여권 상층부에서는 아마 문제 삼아봐야 득될 게 없다는 계산을 한 모양이다.‘있다’‘없다’오락가락법적으로는 그렇다치고, 최근 이부총재의 언행을 보면 도의적 정치적으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정치를 계속할만한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부총재는 우선 말바꾸기가 너무 잦다. 먼저 국정원 문건 무단반출문제를 보자.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낸 사람의 보안의식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정원 문건을 마치 개인일기장 갖고 나오듯 아무 생각없이 가져나오고, 보관도 허술해 일부는 분실하고, 또 어떤 것은 아예 파쇄해버린 것도 있다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무단반출사실이 드러난 뒤의 말바꾸기다. 국정원의 양해를 얻은 ‘대출형식’이라고 했다가 국정원장의 ‘승인을 얻었다’에서 승인이아니라‘양해를구했다’고 시시각각으로 바꾸었다.

이뿐인가. ‘언론장악 음모’의혹을 사고 있는 문제의 문건과 관련해서도 이부총재의 말은 오락가락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부총재의 보좌관과 중앙일보 문일현(文日鉉)기자와의 통화내용을 담은 이른바 녹취록의 존재여부에 대한 것으로 그동안 ‘있다’ ‘와전됐다’ ‘없다’ ‘검찰에서 밝히겠다’는 등 수시로 말을 바꿨다. 정치선진국에서라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말을 자주 바꾼 정치인이 온전할 수 있겠나.

이부총재가 정치판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야 된다고 보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주변에서 정보정치 공작정치의 냄새가 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번 ‘문건’사건의 진실이 곧 밝혀질지, 아니면 당분간은 밝혀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 ‘문건’이 이부총재 사무실로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냄새는 충분히 맡을 수 있다. 그 ‘문건’은 성격상 무슨 상품선전지 날아들 듯 들어온게 아니다.

보낸 사람은 대단히 정성을 들여 만들어 미리 보낸다는 사실을 알려놓고(지금까지 드러나기는 보좌관에게만)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주고 받는 과정에서 야구의 투수와 포수가 사인을 주고받듯 뭔가 교감이 있어 보낸 것이다.

여기서 투수는 베이징의 문기자이지만 포수는 누구냐는게 문제의 핵심이다. 이부총재 자신이냐 보좌관이냐다. 투수의 입장에서 던지는 공의 중요성으로 보아 보좌관보다는 이부총재에게 직접 사인을 보내지 않았겠느냐는 게 보통사람들의 보통 생각이다.

소름끼치는 얘기들‘문건’의 전문을 다시 읽어봤다. ‘언론사 사주를 사법처리함으로써 설마 사주를 잡아넣겠느냐는 심리의 허를 찌르고…’ 소름끼치는 얘기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기자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다.

이 내용들이 야당의 주장대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돼 언론대책으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야주장이 다르지만, 누구보다 공작정치 정보정치에 시달린 김대중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하에서, 그것도 집권여당의 부총재 사무실에 이런 ‘공작’문건이 접수되고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깊은 허탈감에 빠진다.

정치를 해서는 안될 사람들은 많다. 정치를 ‘공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기관’출신의 정보맨들은 여(與)건 야(野)건 정치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다. 그들은 자기가 취급하던 정보를 가지고 정치판에서도 뭔가를 해보려는 유혹에 말려들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부총재가 국정원문건을 들고 나온 것도 그 실례(實例)의 일단이다. 또 쿠데타의 주인공, 군사독재정권하에서 공작정치 정보정치에 앞장섰던 사람들, 비록 사면복권은 받았더라도 뇌물수수 등 부정과 비리로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언론계를 빨리 떠나야할 사람들도 있다. 아직도 권력쪽에 끈을 대고 있거나 정치판을 넘보는 언론인, 신당에서 불러주기를 기대하거나 이미 은밀히 부름을 받아놓은 언론인은 영입자 명단이 밝혀지기전에 하루라도 빨리 언론계를 떠나는 게 서로를 위해서 바람직하다. 정계건 언론계건 학계건 떠날 사람은 떠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한 다음 2000년을 맞자.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