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늦은 저녁 서울 금천구 시흥2동 에덴빌라 나동 204호. 6평 남짓한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10여명의 초중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조영범(趙永範·46)씨의 영어강의에 푹 빠져 있었다. 서울 구로소방서 진압계 주임인 조씨를 이곳 학생들은 ‘영어선생님’으로 부른다.
올해로 소방관 생활 25년째인 조씨는 “못다 이룬 ‘선생님’의 꿈을 이루게 해준 아이들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조씨가 이웃의 초중학생들을 상대로 무료 영어강의를 시작한 것은 4년전. 구로 소방파출소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에 다니기가 여의치 않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심한 조씨는 직접 전단을 만들어 동네 곳곳의 게시판에 붙여 ‘제자’들을 모집했다.
“처음엔 10여명을 사무실로 불러모아 하루 1시간씩 가르쳤죠. 소방관이 영어를 가르친다고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이들도 이내 잘 따라줬고요.”
화재현장에서 생명을 담보로 격무를 치르고 나서도 조씨는 퇴근 후 매일 밤 늦게까지 다음날 ‘제자들’에게 나눠줄 교재제작과 교안연구에 매달렸다. 강의에 필요한 칠판과 의자 등은 박봉을 쪼개 구입하거나 직접 재활용센터를 돌며 구했다. 처음에 “괜한 일 한다”며 말리던 가족과 동료들도 조씨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이해하고 지금은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지난해 본서의 진압계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20평 남짓한 자택으로 아이들을 불러 강의를 하고 있다.
그동안 조씨가 배출한 ‘제자’는 줄잡아 100여명. 조씨는 “가끔 어엿한 고교생이 된 아이들로부터 위문전화나 감사편지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조씨가 낮에는 ‘소방관’으로, 밤에는 ‘영어교사’로 바쁜 생활을 자청한 데에는 평생을 교단에 서서 어려운 여건의 청소년들을 상대로 야학활동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남을 돕는 삶을 살라’는 가훈을 새기며 성장한 조씨는 어머니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값진 삶임을 깨닫고 교사의 꿈을 키웠던 것.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꿈은 접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좋아했던 영어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죠. 덕택에 카투사로 군복무를 할 기회도 얻었고요.”
조씨는 소방관 입문 후에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88년 서울올림픽때 ‘영어강사’로 선정돼 동료 소방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 스승의 날, 조씨는 학생들이 ‘보은(報恩)’의 작은 선물이라며 곱게 접은 감사편지를 건네주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갈수록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조씨는 “힘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덧붙였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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