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본 한 경험자는 이와 비슷한 4지선다형 문제의 정답이 엉뚱하게도(?) ‘법이기 때문에(It’s law)’라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고 한다. 법은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미국인의 법의식을 엿볼 수 있다. 우리처럼 법은 적당히 눈치를 봐서 안 지켜도 되는 무슨 편의품 같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우리 사회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법의식 내지 법의식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법은 최소한 이것만은 지켜야 기본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회 구성원들간의 약속이다. 하늘이 내려준 절대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만든 탓에 악법도 있을 수 있다. 그 경우에는 개폐(改廢)캠페인을 벌이면 된다. 그러나 법의 형태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지키는 것이 법치국가 시민의 도리일 것이다.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참사가 경찰 구청 소방서 등의 관계공무원들을 떨게 했다. 30대 초반의 호프집 주인이 잘 봐 달라고 여기저기 돈을 찔러준 대상이 그렇게 많았던 모양이다. 뇌물을 받고 단속정보를 미리 흘려주거나 불법영업 또는 시설기준 미비를 눈감아 준 공무원은 엄벌하는 것이 당연하다.
관계기관들은 대책을 내놓느라 법석이다. 전국 유흥업소 66만여곳 일제점검, 관할구역 바꾸는 교체단속 실시, 유흥업소 단속경찰관 전원교체, 파출소장에 경찰대학 출신 우선 임용 등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과거와 다른 대책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예상됐던 메뉴 수준이다. 몇 달전 씨랜드 화재참사 때도 그랬다.
과연 이런 대책으로 ‘제2의 호프집 참사’를 막을 수 있을까.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유흥업소와 관련 공무원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방안이 주종이다. 유흥업소 단속에도 지역사정에 밝아야 하는 등 어느 정도 전문성이 필요할 텐데 이것을 무시하는 충격요법뿐이다. 청렴도를 높일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은 없고 거의 전시용에 불과하다.
특히 공무원에게만 초점을 맞춘 대책은 우리의 법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회오리를 몰고온 호프집 주인의 평소 행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할경찰서 간부를 자기집에 ‘공짜 전세’ 살게 하는가 하면 새벽시간에 과일과 김밥을 싸들고 경찰서를 방문했다. 그는 이런 세심한 처세술로 공무원들을 불법의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호프집 2곳, 노래방 2곳, 게임방 3곳, 콜라텍 2곳 등 주로 청소년 상대의 영업을 하면서 갖가지 탈법과 비리, 사고로 바람잘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업장 폐쇄나 영업정지 명령 따위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운전분야에서도 ‘무법자’였다. 지난 3년 동안에만 주정차위반으로 10여 차례나 적발됐으나 한번도 과태료를 안 냈다고 한다. 세금은 제대로 냈을까. 이런 무법자가 큰소리 치고 활보할 수 있는 곳이 우리 사회다. 법을 꼬박꼬박 지키면서 착실히 살아가는 사람은 ‘소시민’으로 격하되기 일쑤이고 검은 돈을 펑펑 써대는 무법자는 ‘통 큰 사람’ ‘의리있는 사람’으로 통해서야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비리공무원 엄벌과 동시에 공무원을 유혹하고 부패시키는 사람은 철저히 제재해야 한다.재벌기업들로부터 수십억 수백억원씩의 뇌물을 받은 전직 대통령들은 짧으나마 교도소 신세를 졌으나 재벌총수 중에 수감된 사람은 없다. 왜 그런가. 돈 준 사실을 자백하는 대신 불구속 특혜를 주는 편의주의적 수사관행 탓 아닌가. 그러니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도 죄의식이 생길 리 없다.
공무원들이 손을 벌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판에 박힌 말은 이제 그만두자. 자신의 위법, 이기심 따위는 뒤에 숨겨놓고 공무원만 나무라는 자세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각자가 법대로 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손 벌리는 공무원이 있다면 가차없이 고발하는 새 풍토를 만들자.
육정수<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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