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아보니]김미화/아직은 차가운 고국의 품

  • 입력 1999년 11월 9일 19시 58분


신혼의 꿈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7월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새 생활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안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29년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정든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는 슬픔이 있었지만 할아버지 고국에 왔다는 생각에 외국인이라는 느낌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던 날 거리와 사람들 모습에서 나의 고향 중국 다롄(大連)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더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나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찼던 이곳에서 몇 개월이 지나면서 점점 실망이 쌓여가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과 중국교포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느끼며 가슴아팠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 일이 잘 되지 않아 고민하는 남편 때문에 한국에 온 지 열흘만에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관악구청 일자리 찾아주기 센터에서 회사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들고 지도를 보면서 어렵게 종로 번역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영어를 배우는 곳이 있느냐’며 아예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실제로 내가 컴퓨터를 다루고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도 하고 중국 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자 그제야 내 이야기를 조금 믿어주는 듯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한국에 온 지 열흘밖에 안되는데 왜 벌써 일자리를 찾으려 하는가? 위장결혼이 아닌가?” 물론 자기가 고용하려는 직원에 대해 잘 알아두려는 생각에서였겠지만 취업희망자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다.

지금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나빠졌다. 한국에 불법체류하는 중국교포들의 약점을 이용해 임금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한국인은 극소수겠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안경점에 찾아갔다. 서투른 한국말로 “안경을 수리해달라”고 하자 아주 기분 나쁜 눈길로 흘겨보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북한말을 쓰기 때문에 내 말투에서 중국교포라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화가 났지만 참고 나와 ‘일본어 가능’이라고 적어놓은 다른 안경점에 가 일본말로 ‘수리해달라’고 하자 아주 친절하게 잘해주는 것이었다. 중국교포와 일본인에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판이할 수 있는가. 한 핏줄을 타고난 교포인 중국 조선족이 왜 지난날 우리 땅을 빼앗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고마운 사람도 적지 않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고마운 분들 때문에 한국 생활에 적응이 잘됐다.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곳 예법을 몰라 실수가 많지만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님은 너그럽게 이해해주신다. 주위 분들도 나를 도와주기 위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시골 할머니들은 중국 며느리가 왔다고 한국 떡을 먹어보라며 가지고 오신다. 시누이는 내가 음식을 할 줄 모른다고 손수 지은 음식을 언제나 가져다준다. 맏동서는 철모르는 동서라 제사상을 혼자 다 차리시고도 “오느라고 힘들었다”며 “좀 쉬라”고 하신다. 고마울 뿐이다. 이분들에게서 한국의 또 다른 얼굴을 본다.

김미화<중국교포>

[약력]△71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시 출생 △94년 헤이룽장(黑龍江)대 일본어학과 졸업 △94∼99년 중 미 일 합작회사인 FLOAT GLASS사 근무 △99년∼현재 한국 무역회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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