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35년이나 살았으니 한국어와 영어는 달통하였을 것이고, 일본 도쿄대학 출신이니 일본어에 유창할 것이며,독일에서 7년간 살면서 예술가로서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으므로 또한 독일어를 잘 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금증이 백남준의 한국인 친지들을 매우 당혹케 한다는 사실을 백남준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그의 한국어는 알다시피 50년 그가 일본으로 유학간 시점에서 멈추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아니다.
외국생활의 대부분을 외국인들과 함께 예술현장에서만 살았고
모국어를 적극적으로 훈련할 기회라고는 그가 한국에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다.때문에 그의 외국어와 한국어는
어느 것이 앞선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만큼 엇비슷한 수준이다.
백남준의 한국어 실력은 50년대까지 유통되다가 소멸된 문법과 어투가 상당수에 달한다. 흡사 중국 옌볜교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월의 차이를 느끼는 것처럼 백남준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우리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50년쯤 되돌아간 느낌을 받게된다. 구어체는 물론이고 문어체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그가 1958년 한국의 자유신문에 기고하였던 유럽음악계에 관한 소개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1928년에 ‘힌데맛과(토ㅅ호’가 蓄音機(축음기)를 위한 蓄音機 音樂(음악)을 만드렀다. 나는 아직 못드러보았으나 이 兩人(양인)의 傑作을 通(통)해서 이 兩人이 錄音器를 爲(위)해서 誕生(탄생)한 人物(인물)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한국의 미술상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내 작품은 도매로 한 점에 ××정도 하는데 소매 값은 항차 가치를 분별하사 알아서들 결정해야 할 거외다”
이러한 예는 실재로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경어체를 잊어버린 나머지 반말도 예사다.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첫 귀국하여 그의 소년시절 음악교사인 신재덕선생과 40년 가까지 만에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신재덕선생에게 거의 반말에 가까운 말투를 사용하여 주위를 당황케 하였다. 그러다가 신재덕선생의 부군인 동아일보 오재경 전사장에게는 기어이 한마디 듣고야 말았다.
“한국말을 아예 까먹은 모양이구나. 아무에게나 반말인 것을 보면, 그러다가 상놈소리 듣겠다.” 백남준의 소년시절부터 지켜보았던 오재경사장인고로 그의 애정어린 우스개소리는 세월을 탓하는 소리였다.
백남준의 말버릇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종의 스타일이나 ‘백남준 예술언어’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백남준의 이러한 말투는 역사를 50년이나 갑자기 거스를 수 없는, 어쩌면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자신의 언어구조를 슬며시 즐기는 모양이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좋은 점도 있지만 지나친 나이 위주의 위계질서는 창조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의 다른 외국어 실력은 어떠한다. 우선 그의 영어는 문장이나 표현에서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뜻은 우선 그의 영어가 아름답다는 뜻도 있지만 단어선택이나 표현의 도치법 등이 가히 예술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35년 미국생활에서 터득한 언어감각인 동시에 예술가가 뱉어내는 위트와 패러독스가 어우러진 언어예술인 셈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그의 영어를 아무 문제없이 알아듣거나 문자 그대로 예술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한다. 우선 그의 영어발음은 거의 일본식이다. 일제하에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에서 부인 쿠보다 시게코여사와 나누는 언어가 영어나 일본어이기 때문에 발음이 교정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와 얘기를 나누는 외국인들은 언제나 신경을 집중시키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수 있다.
미국의 텔레비전이 그와 인터뷰를 할 때면 으레 화면 아래에 자막을 깔아놓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본어 발음이 푸대접을 받을 때는 매우 언짢은 내색을 노골화한다. 2000년에 예정된 그의 회고전 문제를 확정하기 위하여 구겐하임 미술관 토마스 크렌즈 관장과 대화를 나누는 매우 정치적인 자리에서의 일이다.
백남준과 이야기를 나누던 크렌즈관장이 잘못알아 들었다는 뜻으로 익스큐즈 미(Excuse me)를 연발하자 백남준은 본론을 집어치운 채 불쑥 “대부분의 내 미국친구들은 내 영어를 매우 잘 알아듣는데 당신은 왜 자꾸 말을 시키는가”라며 한 대 먹여 주위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웬만하면 그런 식으로 되받아 칠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집에 전화를 걸면 독특한 발음과 억양, 그리고 언어감각의 자동녹음장치가 작동하였다. “디스 이즈 남준 백, 프리즈 리브 어 메시지, 스로리, 베리 베리 스로리!(This is Nam June Paik, Please leave a message,slowly,very slowly)그의 이 녹음장치는 국제미술계에 잘 알려진, 일종의 백남준 식 전매특허이다. 백남준이 없는 자리에서는 모두가 흉내를 내며 배꼽을 잡는 것이다.
백남준이 만나는 다양한 외국인 가운데 특히 일본인이나 영어권 사람, 독일어권 친지,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가 순간적으로 언어를 전환하면서 몇 개 국어로 대화에 임한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1분전에 영어로 말하다가 다시 독일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그의 종횡무진하는 언어의 기교를 보면서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약소국가 출신의 예술가가 거친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래야 되는가보다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국어를 말하는 백남준을 보면서 그들 자신도 깊은 동료의식을 느끼는 장면도 다수 목격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예외가 있다. 그는 어쩌면 한국어보다도 일본어를 더 잘 할지 모르지만, 한국인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거의 일본어를 하지 않는다.
가령 일본인이 그에게 일본어로 어떤 질문을 던진다 해도 그 대답은 영어로 하거나 아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경우, 또는 영어로 해달라는 주문을 낸다.
이 경우 일본인들은 대개 머슥해지거나 그의 입장을 이해하여 영어로 전환하는 일이 많다. 이 경우는 물론 상대방이 영어를 할수 있어야 한다.
백남준은 언어에 관한한 영원한 나그네인 셈이다. 그렇다고 사는데 불편을 느낀다거나 예술활동에 지장을 주는 일은 전혀 없다. 어차피 예술가인 마당에 언어도 예술적인들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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