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오늘 웬일이니, 한가한 모양이지?
오늘 모처럼 박 형 수술이 없는 날이래. 먼저 나가 있으라구 그랬어.
정희는 그전 보다는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전에는 눈가에 피곤한 주름이 잡혀 있거나 때 묻은 가운을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채로 나오는 적도 있었고 대개는 바지 차림일 때가 많았다. 그맘 때에 정희는 막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 나이 스물 일곱이면 그리 적은 것도 아니었지만 정희는 아직도 대학 초년생 같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이었다. 나 보다는 얼굴이 좀 통통하나 편이었고 여자다웠다고나 할까. 정희의 눈과 입술을 보니 나오면서 새로 화장한 듯했다. 나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고 물감 묻은 청바지에 얇은 카디간 차림이었지만, 정희는 검은 원피스에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얘 난 그냥 차나 한 잔 하구 가야겠다.
왜 그래. 박 형이 모처럼 저녁 산다는데.
글쎄 내가 끼어두 되나 몰라.
실은 우리…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는 그 무렵에 개인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 자신 속으로 몰두할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나는 폭발해 버리거나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은결이는 제법 지각 있는 말을 종알거릴 정도로 자랐다.
나 결혼할 거야.
정희가 말했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당연하잖아. 그 사람 제대두 했구 직장도 생긴 셈이니까. 어머니껜 말씀 드렸니?
어머니가 먼저 꺼내셨어. 지난 달에 양가 부모님도 만나 뵈었구 날짜도 잡아 놨어.
어머, 이런 고얀 것들이… 느이들 그러니까 나만 쏙 빼놓구 인제 마지막 통고하는 거야. 언제지, 날짜가?
이 달 십 육일.
겨우 두 주 남았잖아.
미안해… 우리가 먼저 치르게 되어서.
나는 픽 웃고나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미안하긴… 전에두 얘기했지만 난 똥차 아니니? 하여튼 축하한다.
엄마가 나 보구 말하래.
공연히 주위에서 수근수근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기분이 슬슬 상했다.
어머니는 이럴 때 보면 참 구식이구나.
정희는 찻잔에 루즈가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입술을 모으고 마셨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순응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세상의 원칙이라면.
언니 나 결혼하면…집으루 들어와.
응, 그렇게 되나?
집엔 엄마하구 은결이만 남게 되잖아.
새 봄이면 고것이 벌써 다섯 살이구나. 유치원에라두 일찍 보내야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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