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홍성대/私學이 살아야 교육이 산다

  • 입력 1999년 11월 11일 19시 51분


구한말에 타오르기 시작한 중등사학의 횃불은 지난 1세기 동안 꺼진 적이 없다. 험악했던 일제치하에서도, 궁핍했던 광복 이후에도 중등사학의 횃불은 국가 민족의 2세 교육을 묵묵히 이끌었다. 지금도 전체 고등학생의 58%, 중학생의 24%가 사학교육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등사학은 정부의 갖가지 규제와 간섭으로 그 자주성이 철저히 짓밟혔다. 사학은 원하는 학생을 자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어야 하고 학생은 원하는 학교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평준화 시책 때문에 중등사학은 교육감이 배정해준 학생이나 가르치는 위탁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지속된 수업료 통제로 사학재정은 파탄 지경에 허덕인다. 인건비가 학교 운영비의 96%나 차지할 정도로 재정이 경직돼 사학의 생명인 건학이념의 구현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다.

정부는 국공립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인 교육과정의 편성을 강요하고 있다. 독자적인 교육과정의 운영으로 사학 본연의 특성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철저히 막혀 있는 것이다.

법령보다 교육청이나 교육부의 지침을 우선 내세우는 불법 부당한 교육행정도 서슴지 않고 자행된다. 이처럼 사학의 존재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정책이 지속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첫째, 국가나 사회가 사학의 특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대 정부는 사학을 국공립이나 다름없이 획일화된 규제의 틀 속에 묶어 놓았다. 사학은 엄연히 공학과는 차이가 있어야 하며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특성화를 꾀할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사학의 자율화와 특성화를 적극 추진해왔다.

둘째, 역대 정부가 교육을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육부는 교육의 본질을 위해 국민에게 고통이 돌아가는 정책일지라도 국민을 설득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당국은 교육정책을 마치 민원해결 행정처럼 다루었다.끝으로 정부의 규제는 일부 사학의 비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든 비리는 없을 수 없다. 중등사학만 하더라도 900여 개 법인, 1700여 개 학교가 있다. 이만한 대규모 집단의 어느 한 곳에도 비리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지만 다른 사회집단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사학에서 비리가 생기면 그 때마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강화됐다. 건실한 사학이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미국에는 아직도 졸업장을 파는 엉터리 사학이 있는가 하면 하버드와 같은 명문사학도 있다. 만약 미국이 일부 사학의 비리를 없애는 데만 매달려 사학의 자율성 신장에 힘쓰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하버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일부 사학 비리를 내세워 모든 사학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건실한 사학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장해 세계적인 명문사학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요즈음 “교실붕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날로 커진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공교육의 붕괴가 심각한데도 사학만은 안정된 인재양성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자율성과 특수성의 보장으로 사학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학 역시 비록 일부에 국한된 비리라 할지라도 이를 외면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모두 나서서 부지런히 지워나가는 자세를 보여야 하다.

눈앞에 닥친 새천년부터는 사학의 생명력이 신장되기를 기대한다. 사학을 살리는 길이 이 나라 교육을 살리는 길이다.

홍성대<사단법인 사립중고교 법인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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