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러 사회주의 혁명]

  • 입력 1999년 11월 14일 18시 49분


20세기는 폭풍우같은 ‘혁명의 시대’였다. 전세계를 휩쓴 혁명의 물결, 그 처음이자 절정에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이 우뚝 솟아 있다. 10월 혁명은 인류가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또 금세기 수많은 혁명들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혁명의 세기’ 20세기의 진정한 개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예언도 완전히 빗나갔다.

▼ 수많은 사상-운동 결과물 ▼

1917년 10월, 그리고 러시아. 왜, 그때, 그곳에서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10월 혁명은 오랜 세월 수많은 사상과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숱한 우연적 요인들이 겹쳐져 혁명의 ‘불씨’와 ‘기름’ 역할을 했다. 때로는 혁명의 ‘선로’를 바꾸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의 ‘씨앗’은 1905년 겨울, 어느 추운 일요일 오전 눈위에 뿌려졌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사회운동이 ‘싹’을 틔웠다. 이 싹을 혁명의 ‘나무줄기’로 성장시킨 것은 한 신부의 엉뚱한 발상이었다.

노동계급 속에서 활동하던 신부 가퐁은 노동자들의 염원을 모아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 머물고 있는 차르에게 행진할 계획을 세웠다.

‘존경하는 아버지 차르’로 시작되는 청원서를 들고 동궁으로 행진한다는 이 계획은 당시로선 불온한 발상. 내무장관은 가퐁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가퐁을 체포했다면 행진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시 경찰국장이 웬일인지 이를 머뭇거렸다. 그러는 새 거사일인 1월9일 날이 밝았다. 정부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자 노동자들은 차르가 자신들의 청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수십만 노동자와 가족들은 언 손에 입김을 불어대면서 동궁으로 행진했지만 돌아온 것은 잔혹한 칼부림과 무차별 사격이었다. 동궁 광장의 하얀 눈은 붉은 핏자국으로 물들었다.

황제에 대한 청원은 실패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실패는 차르 체제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됐고 러시아 사회운동에 맹렬한 불을 지폈다.

운동은 노도가 되어 12년 뒤인 17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1차대전 중 식량과 연료부족에 신음한 민중은 다시 일어섰다. 이들은 더이상 차르에게 자비를 구걸하던 양순한 백성이 아니었다. 대신 성난 표정으로 ‘차르 타도’를 외치며 동궁으로 몰려갔다. 이들의 성난 기세 앞에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왕위를 내놓아야 했다.

철옹성 같던 제정은 붕괴됐다. 그러나 이걸로 혁명이 완성된 건 아니었다.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가 계속됐다. 한쪽에는 개혁적인 부르주아 및 의회세력이 결합한 임시정부가, 다른 쪽에는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의 권력이 공존했다.

노동자들의 높아져가는 욕구는 임시정부의 ‘부르주아적인 울타리’에 가둘 수 없게 됐다. 혁명을 ‘지금 이쯤에서’ 멈추려는 세력과 더 ‘페달을 밟으려는’ 세력이 팽팽히 맞섰다.

양 진영의 대결 구도에서 사회주의 세력(볼셰비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한 인물의 뛰어난 지도 덕분이었다.

▼ 레닌 집회 주동혐의 퇴학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그는 사실상 볼셰비키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이 혁명에 투신한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 시끄럽고 떠들썩한 성격의 그는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한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형인 알렉산드르의 죽음. 알렉산드르는 차르의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21세의 나이에 처형됐다. 레닌은 형의 죽음과 관련된 항의집회를 주동하다가 대학에서 퇴학당한다. 만약 형이 죽지 않았다면 레닌의 운명, 혹은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외국에 망명중이던 레닌이 17년 4월 러시아로 귀국하기까지의 드라마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레닌이 2월혁명 소식을 들은 건 그 며칠 뒤인 2월 하순 망명지인 스위스 취리히에서였다. 그는 즉시 귀국하려고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을 계속하고자 한 임정으로선 전쟁반대론을 주도하는 레닌의 귀국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연합국측도 마찬가지로 이를 불허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초조해진 레닌은 “이 저주스러운 스위스를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수많은 궁리끝에 ‘묘안’이 나왔다. 독일정부의 협조를 얻어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는 방안이었다. 러시아와 휴전하면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려 연합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수 있다는 독일의 계산을 이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독일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번엔 레닌이 고민에 빠졌다. 적성국의 도움을 얻어 귀국하면 혹시 반역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탈 것이냐, 말 것이냐.’ 그 자신과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다시 기로에 섰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는 레닌은 결국 독일정부가 내준 특별열차를 탔다. 4월3일 마침내 돌아온 레닌을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열렬히 맞았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0월25일,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알리는 사자후를 토했다.

〈페테르부르크〓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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