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산 없는 싸움이라며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대성금속은 국내 변리사와 미국 현지 특허전문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대성금속은 86년부터 ‘777’이란 상표로 미국시장에 수출했다. 등록시기보다는 사용시기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상표권제도를 파고들었다.
보잉은 ‘777’밑에 ‘대성’이란 상표명을 표기하는 조건을 제시한 대성금속의 타협안을 수용했다. 대성금속은 이때 1억원을 썼지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얻었다. 보잉과 상표권 분쟁을 국내외 언론이 다루는 과정에서 얻어진 홍보효과는 수억원대라는 것이 이 회사의 설명이다.
법체계도 다른 외국 법정에서 대성금속과 같이 승소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웬만한 기업은 국제소송이 걸리면 주눅부터 드는 것이 현실. 특히 실력있는 법률전문가를 고용하기 힘든 중소기업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85년 앨범파동은 대표적인 사례로 아직까지 거론된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산 앨범에 대해 65%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이 바람에 대미(對美) 앨범 수출이 전면 중단됐고 재고물량이 덤핑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수십개 앨범업체들이 연쇄 도산했다. 국내 중소 앨범업체들은 미 상무부가 반덤핑 판정을 내릴 때까지 법률적인 대응을 전혀 못했다.
대기업들도 국제소송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 98년초 SK증권 주택은행 등 국내 금융기관이 미국 굴지의 상업은행인 JP 모건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업계와 일부 언론은 무모한 싸움이라고 평했다. SK그룹 일각에서조차 JP모건이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JP모건은 한국 금융기관들이 소송을 제기하자 일순 당황했다고 한다. 자신이 제시한 타협안을 국내 금융기관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것으로 보던 차에 허를 찔린 것이다. 결국 JP모건이 SK가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대성금속과 보잉, SK와 JP모건 소송은 스포츠 경기에서처럼 기업간의 법률분쟁에서도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올 2월 미국 퀄컴사를 상대로 1억달러 상당의 기술료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중재신청을 국제상사중재원에 제기했다. ETRI가 이같은 결단을 내리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변호사비만 날릴 것”이라며 안팎에서 만류하고 나섰다.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방식 원천기술을 보유한 퀄컴을 건드려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우려도 소송을 망설이게 했다.
태평양 법무법인 오양호(吳亮鎬)변호사는 “한국 기업들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간에 국제소송을 기피하려 든다”며 “한국 기업이 해외 기업을 상대로 먼저 소송을 제기한 예가 드물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한국 기업들이 제 권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기업이 외국 법정에서 승소하는 사례가 늘어났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판판이 패소했다. 국제소송에 임하는 한국기업들의 자세가 잘못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국내 굴지의 P사는 몇년전 미국에서 피소되자 현지 전문 변호사 대신 국제변호사 자격을 보유한 대표이사의 사위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보유한 변호사였지만 미 법정에서 쟁쟁한 미국측 일류 변호사와 겨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패소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들은 국제소송이 벌어지면 으레 해당국 지사장에게 소송 준비를 지시했다. 변호사 시장에 어두운 지사장이 전문지식을 갖춘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쉽지 않았고 우왕좌왕하다가 수십만달러의 변호사 비용만 날린 경우가 허다했다.
국제소송이 주로 외국 법정에서 이뤄진 점도 주요한 패소 요인이었다. 한국 기업이 국내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기보다는 주로 외국 법정에 피고로 서는 경우가 많았다.
소송 당사국의 법정에서 국제소송이 제기되면 자국 기업에 유리하게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자국 기업에 유리하게 법률까지 소급 입법하는 사례도 있다.
87년 현대상선 소속 화물선 뉴월드호는 브라질 해안에서 좌초됐다. 미 국방부 수로국(DMA)이 제작한 해도(海圖)에 수심이 잘못 표기된데 따른 사고였다. 현대상선은 89년5월 뉴욕연방법원에 440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94년9월 승소가 확실하다는 예비 판결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가 한달뒤 “미 정부가 발행한 지도의 오기(誤記)로 인한 사건에 대해 미 정부에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다. 한술 더 떠 미 의회는 “현재 소송이 진행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이 법을 적용한다”는 단서조항까지 곁들였다. 결국 현대상선은 승소 일보 직전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제소송은 손해배상 범위가 국내 재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 해당 기업을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는 94년 엑셀 안전벨트와 관련해 30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240억원)의 제조물책임(PL)소송에 제소당했다. 다행히 현대가 승소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해 이익금 대부분을 배상금으로 내줄 뻔했다.
세계 경제 환경이 국경없는 세계화 체제로 재편되면서 국제 소송은 갈수록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오양호 변호사는 “미리 백기부터 들려고 하지 말고 불퇴전의 자세로 나가다보면 타협을 통해 절반의 승리라도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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