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신뢰의 위기, 권력의 위기

  • 입력 1999년 11월 19일 19시 40분


당초 내달 19일로 예정됐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가 내년 1월 중순으로 연기됐다는 보도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이어 터져나오는 온갖 악재(惡材)로 국정이 ‘총체적 혼돈’에 빠져 있는 판국에 대통령인들 국민에게 무슨 새시대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현집권세력은 그동안 문제가 터질 때면 줄곧 야당의 발목잡기와 반(反)개혁적 수구세력의 조직적 저항을 탓하곤 했다. 걸핏하면 소수정권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요즘들어 여권 내부에서는 근본적으로 정권의 위기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대통령 1인 중심의 국정운영체제에서 청와대와 당, 정부가 따로 놀다보니 문제가 생겨도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대책은커녕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해 혼란만 가중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정권이 맞고 있는 근본적인 위기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집권층에 대한 ‘신뢰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옷로비 의혹’사건의 경우 문제의 본질은 애초부터 ‘실패한 로비’에 있지 않았다. 국민은 집권층의 도덕적 해이와 거짓말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현정권의 ‘오만과 편견’은 이러한 국민의 정서를 외면했다. 그렇지않고서야 사건 핵심인물의 남편을 검찰총장에서 법무장관 자리에 옮겨 앉힌 채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있겠는가. 뒤늦게 특별검사에 의해 사건 수사 당시 검찰의 ‘은폐조작 의혹’까지 부각된 것은 ‘당연한 업보’인지도 모른다.

‘언론장악 음모 의혹’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여권은 처음부터 사건의 본질인 언론대책문건의 작성 경위와 권력의 언론장악 기도 여부보다는 곁가지에 불과한 폭로과정의 명예훼손 부분만을 강조했고, 검찰 수사 또한 단순한 해프닝으로 결론지어가는 분위기다. 그러나 여권은 국민 대다수가 그런 결론에 불신을 넘는 냉소를 보내고 있으며 그것은 ‘옷로비 의혹’ 당시 검찰 수사를 바라보던 눈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뿐인가. ‘국가정보원의 6·3 재선거 문건’에 대해 ‘비서의 개인적 작품’이라는 집권여당 부총재측의 군색한 변명에 이르러서는 아예 고개를 돌릴 지경이다.

이렇듯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려는 자세보다는 거짓말과 궤변으로 국면을 일시적으로 호도하고 정략적으로 풀어나가려는데서 국민적 불신은 심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신은 급기야 청와대, 여야(與野) 정치권은 물론 권력기관, 언론 등 사회 전반의 기성조직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확대 증폭되기 마련이다. 이래서는 내일의 희망도, 미래의 비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집권세력은 내년 총선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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