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경달/알맹이빠진 판공비 공개

  • 입력 1999년 11월 25일 18시 51분


고건(高建)서울시장은 최근 사석에서 판공비 공개와 관련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고시장의 고민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같이 밥 먹은 사람의 이름까지 밝혀야 하나’라는 공개 범위의 문제. 또 하나는 서울시가 판공비를 공개한 뒤 다른 자치단체장과 정부 부처 기관장들이 갖게 될 부담이었다.

사실 서울시측은 지난해 11월 참여연대가 서울시장의 판공비 공개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이같은 고민을 계속해왔다. ‘안방금고’를 어디까지 열어보여야 할 지 내용과 절차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서울시 간부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벗어야 합니까. 시장과 밥 한번 함께 먹었다고 이름이 공개된다면 앞으로 누가 시장을 만나려고 할지…”라고 하소연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는 25일 시장 판공비 사용 명세를 공개했다. 이에 대해 정무부시장은 ‘흐린 연못 속의 물고기’가 일단 ‘수족관 속의 물고기’로 변하는 과정이라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서울시가 이날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시장 판공비를 공개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동안 판공비를 둘러싼 숱한 논란과 불신을 잠재우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참여연대가 지적했듯 지출 대상자의 신원이 들어 있지 않았다. 또 지출항목도 자세히 분류되지 않아 제3자가 ‘낭비의 흔적’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고시장은 지난달 국제반부패회의에서 ‘인터넷 민원처리 공개방’을 통해 비리척결에 앞장서고 있다고 밝혀 ‘국제적인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시민의 세금인 판공비 사용 명세를 투명하게 밝히는 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김경달〈지방자치부〉d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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