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한쪽 주머니만 연 판공비 공개

  • 입력 1999년 11월 26일 19시 46분


고건(高建)서울시장이 광역자치단체장으로는 처음으로 시장 판공비 사용내용을 밝혔지만 몇가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우선 고시장은 지난 16개월동안 판공비로 4억9300여만원을 썼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그것만 썼겠느냐, 서울시 각 실 국에 배정해놓은 업무추진비 59억원 중 일부도 갖다쓰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당장 시민단체들에 의해 제기됐다. 실 국의 업무추진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시장 판공비로 돌려쓸 수 있는 데 이 내용은 전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시민단체들이 부시장 및 실 국장의 판공비까지 밝히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투명하게 판공비 실태를 밝힐 결심이었다면 시 전체의 내용을 공개해 의혹이 일지 않도록 했어야 옳았다.

고시장 본인의 판공비 사용내용도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그가 쓴 판공비 중 약 절반은 시민, 단체, 시설 등에 격려 성금 등으로 쓰였다 하니 이를 문제삼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나머지 2억1800여만원은 식사비로 분류되는 간담회 비용으로 썼다면서도 누구와 무슨 명목으로 만났는지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때문에 한달 평균 1300여만원씩을 지출한 식사비가 정말 공적인 용도로 쓰였는지 검증할 길이 없다. 고시장측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함께 식사한 사람의 명단 등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절반공개로 과연 ‘예산집행의 투명성’을 내세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식사비의 과다책정도 문제다. 고시장은 주요 외부인사와 식사할 때는 1인당 6만원 정도의 식사를 한 것으로 계산됐다. 작년 7월 그가 시장에 취임했을 때나 지금이나 IMF의 악몽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특히 서울시의 경우 실업자가 거리를 배회하고 노숙자 문제의 해결이 아직 요원한 상태다. 그런 마당에 시장이 시민의 세금으로 1인당 6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고통분담’의 마음가짐이 조금이나마 있었는지 묻고 싶다.

고건시장에 이어 홍선기(洪善基)대전시장과 심대평(沈大平)충남지사도 판공비 내용을 공개했으나 이들 역시 고시장의 경우와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시민 권익 찾기 차원에서 전개해온 기관장 판공비 공개운동이 일단 성과를 거둔 것은 바람직하나 이런 식으로 한쪽 주머니만 열어보이는 공개는 재검토해야 한다. 적어도 정부내 각급 단체나 기관의 장 및 산하 실 국의 판공비 사용 총액과 주요내용은 소상히 밝히는 것이 납세자인 국민에 대한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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